지름과 높이가 6cm쯤 되는 황토색 커피잔에, 같은 색 소서를 받치고 믹스커피를 마시면 더 맛있다는 걸 아빠의 만족한 얼굴을 보면서 어린 나는 그렇게 믿었다. 단칸방에, 네 가족이 먹고살아야 하는 고된 인생살이에도 그 잔에 커피를 마시는 그때만큼은 인생의 시름을 잊은 듯, 아니 어쩌면 그는 홀로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까지 일으킬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무심한 엄마가 다른 잔에 커피를 담아 오는 날에는 그 커피잔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그러면 또 나는, 그 잔에 마시면 더 맛있냐고도 물었다.
아빠는 엄마 뱃속에 내 동생이 있을 때 리비아라는 나라로 갔다. 우리나라 동아건설의 대규모 수로 공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말이다. 국토의 90퍼센트가 사막인 리비아에 1,874km의 수로를 건설한 건 인간이 만든 최대 규모라며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1984년에 착공하여 1991년에 완공하는 1단계 공사에 인원 1,100만 명, 550만 대의 건설 중장비가 동원되었다는 그곳에 아빠가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기록의 이면에는 작업 현장이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사하라 사막 한복판이란 것이다. 큰 모래바람이 불면 지형도 바뀌는 어마어마한 사막에 물길을 내는 작업 환경의 열악함은 짐작하기에도 어렵다.
종종 아빠로부터 편지가 왔다. 엄마에게, 때때로 딸들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사진도 더러 있었는데 아빠 주변에 수로로 보이는 원통들이 많이 보였고 한국인, 현지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드시거나 축구를 하면서 여가를 보내는 사진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빠의 생김새는 사진으로 알 수 있었다.
몇 해가 지나고 아빠가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가족과 친척 몇 명이 공항에 함께 갔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빠가 마침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진을 보면서는 아빠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막상 실물로 나타난 그 남자에게는 차마 아빠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삼촌이 눈치를 챘는지 ‘아빠라고 불러 봐’라고 말하는데도, 나는 그 말을 하는 게 그렇게 부끄럽고 이상했다. 이제부터는 같이 살아야 하니 억지로, 내 딴에는 큰마음을 먹고 아빠라는 말을 뱉어 보았다. 그렇게 그 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아왔다. 금발의 여인들과 찍은 사진들도 있었고 그전에 아빠가 보내왔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배경의 사진들이었다. 아빠는 한국에 오기 전 스위스라는 나라를 여행하고 온 것이었다. 지금 알고 보니 귀국 선물로 엄마에게는 까르띠에, 나에게는 알록달록한 스와치 시계를 사 오셨다.
아빠는 강원도 강릉의 지독히 가난했던 칠 남매의 집에서 부모도 없이 상경한 청년이었다. 한때는 신발도 없이 걸어 다녔는데 어린 나이에도 창피했더라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었다. 어떤 고생을 했는지 물어보기에 두려울 정도의 경험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살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야 하니 배 속에 아기를 볼 여유도 없이 그렇게 사하라 사막으로 떠난 것이다. 막 결혼한 부인, 어린 자녀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몇 년의 시간이 보내고 고된 노동의 마지막에 낯선 땅을 여행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말 그대로 꿈같은 일이었겠고, 흥분과 충격의 경험이었겠다.
20대 여행란 걸 하면서 호텔이란 곳에 가보고 불현듯 아빠 생각이 났다. 방에 구비된 커피잔이 아빠의 애장품이던 커피잔과 모양이 비슷했다. 그도 호텔이란 곳에 묵었나 보다. 내가 호텔에서 커피잔을 보고 아빠가 떠올랐으니. 아빠는 그때의 기억으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온 한국은 어쩌면 그에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결국 벗어나지 못한 단칸방 생활부터 날마다 어린 두 아이가 눈앞에 왔다 갔다 했고, 몸이 아프신 장모님도 함께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에게 낯선 땅이 주었던 설렘과 즐거운 감정을 담은 커피잔은 그의 고된 현실을 달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화된 사진에서 아빠가 금발의 여인들과 찍은 사진이 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것이 어린 마음이지만 약간 기분이 상하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금발을 한 사람들의 생김새도 신기했고, 사진 배경으로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건물들과 열차, 버스들이 신기하기도 했다. 어릴 적 그게 마음에 남아 나도 아빠처럼 유럽에서 두 해를 머물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