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잠시 머물다 갑니다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진짜입니다

by 디카페인라떼

이사도 하다보면 는다. 이삿짐을 싸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청소든, 이사든 버리는 게 먼저다. 이번엔 헌옷과 그릇, 가전과 헌책을 수거하는 업체를 알게 돼 먼저 비우기부터 시작했다. 옷을 두 포대인가 헌옷수거업체에 보내고, 또 택배가 오는 걸 보고 남편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비워야 채우는 거야 여보. 아무튼 비운 뒤에는 그릇장이나 수납장은 쓸모대로 미리 정리를 해 두어야 이삿짐 센터 기사님들이 혼선 없이 비슷한 질서로 옮겨 준다.


결혼 4년차, 결혼 후 일 년에 한번 씩 이삿짐을 싼 우리는 올해 12월 네 번째 이사를 했다. 어떤 짐은 지난 번 이삿짐 센터에서 옮겨준 뒤 풀지 않은 채 수납장에 쌓여 있다가 그대로 불려 나왔다. 그 짐은 이번 집에 와서 비로소 책장 어디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이사가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알아버린 지금은, 이삿날을 앞두고 앞선 피로감이 몰려온다. 이른 오전부터 기사님들이 찾아와 바닥에 보완재를 깔고 짐을 뺄 것이고 그 짐의 틈과 바닥에서는 예기치 못한 물건들이 ‘까꿍’하고 얼굴을 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찾을 땐 안보이더니 여기 있었구나. 이제는 뭘 잃어버리면, 이삿날 찾겠지 하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삿날, 짐이 다 빠지기 전에 나갈 집과 들어갈 집의 행정적인 업무를 끝마쳐야 한다. 남편과의 업무 분담과 팀플레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날이다. 이날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이를 비롯한 귀중품을 친정집에 잘 맡기고 나중에 잘 찾아오는 일이다. 아이가 친정에서도 잘 놀고 먹을 수 있도록 스티커북이나 간식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번 이사는 의외로 수월했다. 미리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진을 빼서 인지 막상 당일에는 마음이 편했다. 1년은 낯선 동네가 정든 동네로 변하기 시작해 이제 몸과 마음이 정착을 하려는 타이밍인데, 그 때쯤 우리는 꼭 짐을 싼다. 아쉬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마음이 뒤엉키는 시기다. 매년 전학을 가야하는 어린이의 마음이 이럴까. 마음을 주기도 주지 않기도 애매한 시간.


하지만 장점도 있다. 인간의 기억은 장소에 저장되는 경우가 많아, 각 시기가 각 장소별로 카테고리화 된다. 첫 신혼집을 얻었던 동네, 아이를 임신해서 살았던 집, 아이를 돌 무렵까지 키웠던 집, 아이가 막 걷기 시작해 동네 구석구석을 함께 산책했던 집...


우리가 이사를 하는 이유에는 아이의 출산과 육아도, 바뀐 부동산 정책도 있지만 이삿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다 보면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말이 실제적으로 와 닿는다. 집주인이나 세입자라는 이름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인연도, 이해타산으로 만나면 서로 각박해질 수 밖에 없다는 원리도.


아이는 다행히 새로운 집에서도 잘먹고 잘자고 잘논다. 오미크론 변이의 습격과 한파의 폭격으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데, 아이에게는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집에서 아이는 또 얼마나 자랄까. 유목민처럼 집과 집을 떠도는 동안 우리도 조금은 자랐다. 집에 대한 예의도 조금은 더 배웠다. 어떤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은 이삿짐을 빼고 나면 더 고스란히 남는다. 세탁실의 배수구에, 문 뒤 사각지대의 벽지에, 소파가 있던 자리나 침대를 빼고 난 자리도 주인의 성정과 생활습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살림살이의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나는 이삿날, 그걸 보는 게 일인 이삿짐 센터의 기사님과 이모님들은 늘 그렇듯 묵묵히 이 모든 걸 받아 박스에 넣고 밀봉해 다음 집에 날라준다. 어떤 이모님은 그 사이사이 "내가 이전에 누구누구(이름만 대면 알만한 어떤 유명인) 집을 했는데, 그 주인이 얼마나 잘생겼던지.."부터 살림살이가 어땠는지, 식사와 음료를 잘 챙겼는지 어땠는지를 이야기해주시는데, 남일같지 않아 모골이 송연할 때도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이 아닌게 참으로 다행이다.


이삿날 저녁이면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세제를 풀어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면서 ‘왔다가 간 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는 올 일 없으리라는 곳,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는 사람, 그들에게 새겨진 흔적이 어쩌면 진짜 진짜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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