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좀 천천히 갑시다
오랜만에 학교에 복직한 언니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한 선생님과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 애기 많이 컸지”
“네 이번에 초등학교 입학했어요”
“아이고 많이 키웠네. 우리 애는 벌써 2학년이야”
“아 중학교 2학년이요?”
“아니 대학교 2학년(웃음) 자기 애기만 크는 줄 알았지?”
대학교 2학년이라니 멀고 먼 알리바바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만, 다른 집 아이가 크듯이 우리 집 조카와 아이도 크고 그런 순간은 곧 찾아온다.
아이가 태어난 후 시간은 뭐랄까. 정직하다 못해 빈틈없이 흐른다.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는 어떤 시절은 때로 뭉텅이 뭉텅이로 기억되는데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은 씨줄과 날줄처럼 나의 시간과 아이의 시간이 포개져 매번 새로이 직조된다. 미래도 두배로 명징해진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내 나이는 몇 살, 중학교 입학할 땐 몇 살, 대학에 합격하면 또 몇 살 하는 식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도장을 깨듯 최선을 다해 무리 없이 해낼 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속에서도 시간은 연착 없이 흐른다.
아이의 탄생이 시간에 가속을 붙이는 건 이 모든 게 거짓 없이 흘러서 인지도 모른다. 사이즈가 120, 130, 140으로 부푸는 아이의 발을 보면서 날로 또렷해지는 아이의 발음을 들으면서 나는 매 순간 시간을 체감한다.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늘 빠르고 아쉽고 자비 없다.
벌써 나는 아이가 걷지 못할 때의 일상이, 누워만 있을 때의 감촉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출퇴근 길 아이의 예전 영상을 보면서 흠칫흠칫 놀란다. 아이가 성인과 무리 없이 대화할 수준으로 언어능력이 향상된 뒤 아이가 말 배우던 시절의 동영상을 자주 찾아본다던 교회 동생 부부의 말처럼 지금 곁에 있는데도 우리는 아이가 늘 그립다. 아이의 미래와 아이의 과거는 아이의
현재와 함께하는 이 순간도 저절로 애틋하게 만든다. 꼭 끌어안고 있는데도 더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다. 이렇게 품 안에 안고 있는 시절도 이내 지나간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정수리 냄새를 킁킁 맡으며 <구름빵>을 읽어주던 시절, 잠든 아이를 카시트에서 내려 안은 채로 침대에 눕히던 시절도 이내 지나가고 만다. 그러니 지금은 목이 좀 더 갈라지더라도, 책을 안 보고도 읽을 정도로 페이지를 외우더라도, 11kg인 아이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더라도 견뎌 보는 것이다. 큰 사랑스러움에는 큰 무게가 있게 마련이고 내가 버티지 못할 수준이 되면 아이는 이미 내 품에 없을테니까.
마감기간 원고를 쓰다 커피 한잔이 고파져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우연히 만난 선배와 근황 이야기를 나눴다(아이가 태어나면 안부인사는 주로 아이의 근황이다). 선배는 “나는 잘 키우질 못했는데 아이가 이미 커버려서 이젠 여기에 없다”고 했다. 내가 입사할 때 유치원에 다니던 스타일리시한 꼬마는 이번에 스무살이 됐다. 나는 선배의 후련하면서도 쓸쓸한 얼굴에서, 내 미래의 스포일러를 보았다.
아이가 성인의 문턱을 넘을 때 “이만하면 잘 키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모든 부모는 “이젠 내 품에 없다”라고 말할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니 아이가 지금 책을 들고 와 내 무릎에 앉을 때, 90센티미터의 아이가 내 허벅지 즈음을 붙잡으며 안아달라고 손을 뻗을 때, 아이를 반가이 맞아 주어야지. 그리고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서 흔쾌히 보내주어야지. 무엇보다 아이처럼 나도 자라야지. 아이의 미래에 나 홀로 과거에 멈춰있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