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살림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헬프미 마이셀프

by 디카페인라떼

살림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다 먹은 그릇이

스스로 개수대로 점프하거나 다 마른 건조대의 빨래들이 저절로 고이 접혀 옷장에 쌓이는 일은 없다. 무심코 쓴 물티슈 한 장도 아이의 과자 부스러기도 누군가 치우지 않으면 이들은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거나 더 잘게 쪼개져 표면적을 넓힌다. 그 누군가는 바로 나다.


아이를 보면서 살림살이들이 제때 제기능을 하게 하려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는 최악의 선택이다. 주방으로 가는 동선이라면 거실에 있는 잡동사니 들을 한번 훑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씻을 것은 씻어야 한다.


아이의 간식을 챙길 때도 한 번에 하나씩이 아니라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빵을 먹으면 목이 마를 것이니 우유에 빨대도 챙기고, 빵을 너무 크게 잘라주면 다 먹기 전에 겉이 말라버릴 것이니 소분하되 아이가 분노하지 않을 정도(내 빠아앙 크게 크으으게에 엉엉)로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빵가루가 온 소파와 매트에 떨어지지 않도록 커다란 쟁반을 준비한다. 안 그러면 이 작은 집에서 길을 잃을 염려라도 되는 것인지

아이의 동선마다 빵가루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게 될 테고 당연히 그것도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손으로는 아이 밥을 먹이면서도 머리로는 다음 할 일을 생각한다. 쉬를 변기에 누인 지 얼마나 됐는지 계산하고, 지금 샤워를 시키면 저녁 외출할 때 마를 수 있는지 가늠해본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순순히 욕실로 들어갈 수 있도록 <보글보글 목욕은 참 개운해> 같은 책이나 생활습관 동요를 비치해 둔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은 늘 내 바람만큼 질서 정연하지 않다. 신발장에는 어제 눈밭에서 놀다 남은 잔해가 아이의 신발과 타일을 얼룩지게 하고 있고, 아이의 인디언 텐트에는 아이의 양말과 축구공과 소근육 장난감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미끄럼틀에는 손빨래 한 바지 두 개가 마르고 있고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음료수가 일부는 팩 안에 일부는 테이블 위에 고여있다.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도 모르겠고 치우는 게 의미 있는지는 더 모르겠다.


청소가 쉽지 않아 로봇청소기를 장만했는데 집 안의 지형지물을 피해 청소를 하다 보면 로봇청소기는

어딘가에 갇혀서 오류 넘버를 외치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자동차를 RC카로 선물 받았는데 도통 달리지를 못한다. 부딪힐게 너무 많아서다.


그럼에도 나는 몰래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물티슈로 주변을 훔치고 가는 길에 주방의 선반도 훔치고 재활용품을 한데 모아 분리수거함에 넣은 뒤 적당히 차가워진 귤 몇 개를 들고 다시 아이 곁으로 돌아온다. 다람쥐가 아무리 달려도 이 숲의 혼돈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당장 아이의 입속엔 뭔가가 들어가 냠냠 쩝쩝 꿀꺽하고 있고, 도토리도 자꾸 쌓다 보면 살림에도 뭔가 노하우라는 게 생기겠지.


구정에 양가에 다녀온 짐들을 정리하고 나니 무슨 원룸 이사라도 한 듯이 온 살림살이가 들썩인다. 온천 물놀이도 포함된 일정이라 한여름 워터파크 장비부터 한겨울 기모 내의에 여벌의 경량 패딩과 숙소용 가습기까지 같이 동행했다. 6인 이상 모임이 어려우니

가족들이 함께 먹을 먹을거리도 각 집이 분담해 챙겼다. 그래도 모여서 문어에 소고기에 곰탕까지 야무지게 먹고 통통하게 돌아왔다. 훗날 이 대혼란의 짐들은 다 망각의 일각으로 사라지고 잘먹고 잘놀고 떠들석했던 명절의 기억만 남겠지. 아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위에 둥둥 띄운 튜브에서 방긋 웃는 사진 한장도.


세탁기를 두 번에 나누어 빨래를 돌렸는데 첫 빨래가 아직 제자리를 찾기 전에 두 번째 빨래가 다 돌았다. 미처 정리안 된 의약품과 파우치들과 주전부리는 여전히 식탁 위에 있다. 나는 그들을 노려본다. 저들은 언제 제집을 찾아갈까. 그들도 나를 바라본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