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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슬비 Jun 06. 2023

민화 속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 이야기 (28)

『흉례에 관한 의궤』에  묘사된 '거북(현무)' 도상 (5)

   조선 초기의 『의궤』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겪으며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27년 이후의 『의궤』의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 초기 『의궤』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17세기 『의궤』속에서 ‘거북’은 ‘귀사합체’의 ‘현무’였고,   15∼16세기 ‘현무’의 모습 역시 ‘귀사합체’의 ‘현무’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는 특별한 일(전쟁과 같은)이 없다면, 천천히 변화를 하며,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설령, 어떤 변화의 계기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변화의 흐름은 빨라질 수는 있지만,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내적인 갈등은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종류의 외세의 침입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위협 없이 200여년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조선시대의 사회적 변환점이 될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왕실 문화가 갑자기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은 상황에서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달했을 것이고, 이러한 위기감은 무언가 신령스럽고 힘 있는 존재에 기대고 싶어지게 한다. 기존에 기대고 있던 그 ‘무엇’이 강한 존재였다면, 그 ‘무엇’의 문화는 지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좀더 신령스럽고 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존의 『의궤』에서 거북은 강력한 힘을 가진 ‘현무’의 모습이었으며, 전쟁 후에 왕실에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현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영·정조 시대의 문화에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조선은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맞으면서 정치·사회면으로 모두 안정되면서 경제적인 활동도 활발해지면서『의궤』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의 왕비였던 정성왕후 사후 만들어진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에서 ‘거북 단독’ 형상으로 등장한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상의 변화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한걸음 더 발전한 조선 왕실의 자신감이었고 자존감을 나타낸 것이었다.  ‘거북 단독’ 형상은 강력한 힘을 가진 ‘귀사합체’의 ‘현무(玄武)’의 모습이 아니어도, ‘거북 단독’만으로도 충분히 신령스럽고, 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표 1>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의궤』에 묘사된 거북의 형태 특성을 정리한 것이며, <표 2>는 『의궤』에 묘사된 거북 형태 특성의 변화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표 3>에서는 『의궤』에 묘사된 거북 문양의 변화로 세부적으로 분석하였다. 


  『의궤』에 묘사된 거북은 처음 ‘귀사합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18세기 중반부터는 ‘거북 단독형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세기 초 순조 연간에는 ‘귀사합체’의 형태로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거북 단독형상’으로 바뀌면서 이 형상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1> 『의궤』에 묘사된 거북의 형태 특성
<표 2> 『의궤』에 묘사된 거북 형태 특성의 변화
<표 3> 『의궤』에 묘사된 거북 문양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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