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제주에 묻어둔 아픔.. 이제 꺼내어 달래 줄 수 있다.
창백한 얼굴에 미소조차 없이 등 떠밀려 찾았던 두렵기만 한 제주.
혼자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수도 없이 물으며 일주일 동안 걷고 또 걸었다.
통화도 문자도 심지어 좋아하던 인스타. 페이스북. 뉴스 검색도 모두 정지한 채 나만의 시간 속에 날 가두었다.
누리던 모든 걸 잃고, 손에 움켜쥔 것들을 빼앗기고, 내편이라고 믿었던 이들을 떠나보내고, 이어지는 몰락과 배신에 치를 떨었다. 매일을 술에 의존해야 했고 수면제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던 지난 2020년.
터질 듯이 분노가 차오를 때면 원망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막론하고 모두가 나의 적인 듯 느껴졌고 달래줄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그렇게 춥게 외로이....
그 후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어떤 변화들이 있었던 걸까?
1년 만에 찾은 제주. 가슴이 아프지도 먹먹하지도 않다. 심지어 호텔 숙소에 3일간 틀어박혀있어도 나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1주일간 머물겠다고 챙겨 온 나의 캐리어를 보니 웃음이 난다. 작년 여행 보따리는 등산가방. 등산화. 운동복 등 전문 산행이라도 할 듯한 짐이 여러 보따리였는데 올해는 달랑 운동복 바지 하나. 면티와 입고 있는 캐주얼 한 벌 뿐인 것이다. 아무래도 바깥출입을 전혀 할 맘이 없는 사람처럼 마음을 먹은듯하다. 하지만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며칠간 잠만 자겠다던 나의 생각은 금세 도둑맞았다.
작년 이곳 제주에 나의 울음과 고통을 제대로 묻어두었나 보다.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간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쉬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네 서점이나 사회 여성대학 문화센터에 어반 스케치, 한국화, 켈리그라피 수업들이 생기면 무조건 신청을 했다. 에세이 수업도 신청을 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는 게 음악만 접하던 나는 신세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깐 반짝일까 봐 졸작이지만 완성된 그림과 켈리그라피는 SNS에 포스팅을 하면서 계속 해내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제대로 소화가 되는 법인가 보다. 다시 피아노 연주를 할 수는 없지만 무대가 그리웠고, 화려했던 피아노 레스너로써의 시절로 몸서리 쳐지게 돌아가고 싶었다.
코로나로 인해 빼앗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준비했을까?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난 이 명언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 어떤 행운이 와도 와락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3월에 모든 만물이 소생을 하듯 나도 웅크리던 몸과 맘과 생각을 활짝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거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워나갔다. 쉽지는 않았다.
쉽지 않지. 이 세상 쉬운 게 어디 있겠나.
사단법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4개월 만에 독학으로 법인을 설립했다. 그 과정 중에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었지만 나를 믿고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기댈 수 있게 버텨주는 이가 있어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서류들과 전쟁을 하며 살았다.
음악만 하고 살았지 서류들을 접할 기회가 뭐 얼마나 있었겠어.
생소한 단어들과 서류 형식이 사람을 잡아도 여러 번 잡았다. 법무사에 맡겨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간혹 들었지만 고생은 혼자 다해놓고 치를 경비가 아까워 그마저도 유혹을 물리쳤다. 그렇게 4개월간 울고불고 뒤집어지기를 반복하다가 6월 22일 내 생일날에 설립허가를 받아냈다. 우연일까. 새로 태어나는 그 기분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그게 뭐라고 말이다.
뒤이어 하우스콘서트 무대를 만들고 지역 로컬기업. 공연기획사 등 공연에 관계된 업체들과 협약을 맺었다.
내가 기획한 클래식 콘서트를 감상하며 찬사를 들을 때, 그 말에 모든 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공연 하나를 무대에 올리고 내리기까지의 수고와 반복되는 분노, 그러나 그 원망들은 늘 무대가 내려진 뒤 찬사를 듣게 되면 깡그리 사라지게 된다. 국가 지원금 사업을 했을 때 업무시스템을 몰라 자비를 쓰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을 올린 적도 있었다. 하필이면 코로나19로 힘들어진 시국이라 후원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리더의 무게와 자격. 강하게 누르는 책임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프리미엄 회원제를 만들어 유료회원을 모집하고 회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제휴업체들을 섭렵했다. 방법과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창립 음악회는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반백년 가까이 피아노만 치며 살았는데, 이제 인생 후반을 살게 된 내가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 반, 놀라움 반이다. 사단법인 주관, 주최로 음악콩쿠르를 개최했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예상을 뒤엎은 참가자 수에 관계자들 모두 어리둥절하며 또 한 번 놀랐다.
지난 1년은 아프기만 했다. 올해 1년은 정신없이 일만 하며 보내는 중이다.
머리가 아프고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바쁜데 즐겁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난 두 아이를 성장시킨 엄마로서 공부를 뒷바라지하기엔 혼신의 힘을 쏟지는 않았다. 5세 때부터 시작해 전공을 하기까지의 내 소중했던 병아리 시절을 닭장에서 연습생으로 시들 거리며 보냈기 때문에 음악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는지 내 아이들에게는 국내 1% 인재가 아닐 바에는 뭐든 도전하며 즐기라고 가르친다.
'아무렴 어때, 자기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그만 아니겠나.'
주위에서 이제 좀 쉬라고 하지만 추수할 곡식을 많이 얻으려면 지금 바쁘게 심어야 한다.
추수할 때 마음껏 웃을 수 있을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생쯤이야.
놀랍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1년 전 제주를 찾아 울고불고 죽겠다던 사람이 맞는지.
나의 아픔은 1년 전 이곳에 모두 묻었다. 묻힌 자리에 용기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희망을 주렁주렁 열매 맺게 될 것이다.
향이 가득한 탐스러운 제주 천혜향처럼.
인생은 달고 쓰다는 말처럼 겪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