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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molove Aug 28. 2021

# 2 내 맘 같지가 않다

초인적인 힘이 생겼는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사려니 숲길 출구가 보였다. 사실 입구인지 출구인지 구분이 되어있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시작하려는 입구가 될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에게는 긴 숲 속을 통과하고 나오는 출구   가 될 수도 있겠지. 숲길에 들어설 때만 해도 걸어갈 만한 정신이 아니었는데 10km를 걷다 보니 숲 속의 흙냄새, 나무 냄새, 나뭇잎 부딪끼는 소리, 물소리, 새소리에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화가 된 것 같다.


도로에 나오자 관광버스와 갓길에 주차된 자동차들, 난장을 치고 즐비해있는 장사꾼들, 그리고 주전부리를 사 먹는

사람들로 조금 전 숲 속의 고요함과는 다른 어수선한 장면이다. 방향감각이 좋기로 자부하는 나는 한참을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혁진이가 휴대폰에 설치해준 카카오 맵과 제주 올레길 어플이 생각났다. 기계에는 뒤떨어지는 사람인지라 맵을 이해 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숙소다. 목적지를 입력하니 버스 노선이 나온다. 심지어 몇 분 후에 몇 번 버스가 도착하는지 까지 알려준다. 나이가 50 가까이 되도록 몰랐던 신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무식함이 용감하다

어플에서 알려준 232번 버스가 곧 도착할 예정이다. 망설임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뛰는데 232번 버스가 바로 옆에서 정차했다. 여행객이 많다 보니 기사에게는 흔한 일인 듯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버스에 올라탄 나는 잔돈이 없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하, 그런데 버스비는 얼마지?’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승차권을 이용했고 대학에 다닐 때는 토큰을 이용했다. 그리고 사회인이 되면서 티코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머릿속의 전기가 나간 것 같이 잠시 멍하다가 얼른 만 원짜리  지폐를 교통비 주입구에 넣었다. 기사는  멍청한 표정의 나를  바라보았다.  "아, 잔돈은 안 주셔도 되세요. 죄송합니다."

나는 민망한 나머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다급히 말했지만 딸깍 딸깍 딸깍 딸깍....


이어지는 잔돈 내리는 기사의 버튼 소리는 날 계속 서있게 했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버스 안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왼손으로는 핸들을 오른손으로는 잔돈 반환 버튼을 셀 수 없이 눌렀다. 그렇게 시선은 앞을 보면서....

나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다 내려진 동전을 두 손에 쓸어 담고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한 채 기사 바로 뒤쪽 자리에 앉았다.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렇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살았구나.

그래도 버스에 탔고 버스비도 냈고 그 많은 잔돈까지 받았으니 뭔가 해낸 듯 한 마음에 잔돈을 손에 얹고 사진을 찍었다. 룸밀러 안으로 기사가 나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한심해 보였을까? 엉뚱한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까?


숙소까지 44개의 정류장을 거치면서 40여 분이 걸렸다. 제주도로는 대중교통 수단이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혁진이가 본인이 만든 도로인 양 자랑하더니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기도 전에 배고프니 1분 안에 내려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성질머리 급한 놈 같으니, 그래 앞으로 일주일 머물 거니까 짐은 나중에 정리하자.' 사실 걷느라 우느라, 생각하며 자연경치 보면서, 그리고 버스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배가 고픈 것도 몰랐다가 혁진이가 보낸 문자를 보면서부터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앉아

한산한 저녁 도로를 10분 정도 달리니 숙소 주변의  분위기와는 다른 느낌의 도시가 보였다.

'이곳이 시내인가 보군.'

힙합이 흐르고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는 이들,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마시면서 다트게임을 하는 청년, 보는 이의 동공을 흔들리게 할 만큼 한쪽 어깨를 드러낸 니트를 입은 여성이 여러 남성과 기이한 포즈를 취하며 당구를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다. 한쪽 벽면에 자리 잡은 해골 모형은 마치 날개를  벗어던진 이카루스 같아 보였다.


우린 따뜻한 야채 음식과 맥주를 주문하고 갑자기 할 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불빛 가득한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서로 뭔가 마치 잊고 있었던 게 떠오른 것처럼, 아니 어쩌면 정말 궁금했는데 못 꺼낸 말일지도 모르겠다. 둘은 동시에 같은 이름을 꺼냈다.

“ 은석이는....

서로 놀라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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