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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molove Aug 27. 2021

# 1 이젠 나를 사랑할 차례

제주의 하루

묶어둔 것만 같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쳐버리고만 싶은 역겨움이 뒤엉켜 순서 없이 들이마시고 내뿜고를 몇 차례 하더니 이젠 가슴이 뜨거워졌다.

'안돼,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난 그렇게 제주행 비행기에 내 몸을 맡겼다.


이륙하고 창공을 보며 안정을 취할 즈음 착륙한다는 기장의 멘트가  들려왔다. 지난 여행과는 다르게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마스크 속의 표정은 웃고 있는지 , 화가 나 있는지 구분이 어려웠다. 펜데믹 발표가 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공항은 매우 한산했고 다른 때와 다르게 재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공항 출구로 나와 보니 1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중 나온 친구 녀석이 보인다. 친구도 나도 서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했다. 난 한 번에 혁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적당한 키와 몸매, 50이 가깝도록 여전한 머리스타일. 혁진이가 출구 쪽을 바라보더니 다가왔다. 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지만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 표현될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오는가 싶더니 나를 지나쳐 내 뒤를 따라오던 여성에게 "하이 영미"

이럴 수가, 1년 만에 살이 쪄버린 내 모습을 혁진이가 알아볼 리가 없다. 금세 뒤 여성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주춤한 녀석에게 난 멋쩍어하며 "나 여기 있어" 라고 작은 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녀석은 어제 그랬냐는 듯이 "야! 너무 이뻐져서 몰라봤지"

이런 멘트로 이미 상해버린 내 기분을 돌이키려 하다니. 난 별 대꾸 없이 짐을 던지고 차에 타버렸다.


제주의 도로는 무척이나 한산했고 10월의 가을 하늘과 제주만의 이국적인 풍경은 너무나 푸르고 사랑스러웠다. 우리 둘은 1년 동안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지난 1년간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보다는 현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극성이어서 제주도가 힘들다느니 경기가 안 좋아서 생활이 어렵다느니 지금 제주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행하기에는 최상이라는 둥 어느 코스를 시작할 건지 계획은 있냐며 질문하는데 나의 대답은 "계획 없는데?"


혁진이는 몹시 당황스러워하며 신호대기 중에 나를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씩 웃어주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혁진이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랬다. 1년여 만에 만나면서도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것처럼 대할 수 있는 그런 편한 친구였다.


이동하는 차에서 급히 숙소를 잡고 당장 오늘 계획을 정해줬다. 서귀포 시에 있는 새로 생긴 호텔을 일주일 지낼 수 있게 예약했다. 제주는 버스 노선이 편리하게 되어있어 처음 온 여행객도 쉽게 타고 환승도 어렵지 않게 되어있다고 말해주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 별로 없던 나는 왠지 겁부터 났다. 호텔까지 들렀다가 다시 나오면 반나절이 가버리니 중간에서 내려 사려니 숲길을 가장 먼저 다녀오라고 했다. 호텔 체크인은 혁진이가 해주기로 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남자에게 숙소를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녀석에게 딱히 뭐라고 할 거절의 변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공항과 숙소 중간에 위치한 사려니 숲길에 난 모자와 작은 백팩만 손에 들려진 채 내려졌다. 혁진이는 뒤도 안 보고 도로를 달렸고 난 순간 미아가 된 듯한 묘한 상황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차 안에 있는 내 모든 짐이 살짝 염려스러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서서히 숲길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개울 사이에  아치형 돌다리가 운치 있게 자리하고 있길래 저기서 사진을 찍어보자는 생각에 돌다리 한가운데에 섰다. 개울에 비추인 나의 그림자가 보였다. 왜 그랬을까.... 순간 가슴이 아파왔다. 오전 내 참았던 눈물과 더 이상 지배당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감정들이 결국 뒤엉켜 터져 버렸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도 없는, 날 알아보는 이도 없는 이곳 제주 숲 속에서 난 주저앉아 혼자인 채로 지난 1년간의 악몽을 토해내고 있었다.


진정이 된 건지 모르는 나의 감정을 심호흡과 함께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정리를 했다.

'난 왜 이 길에서 울고 있는 걸까'

'왜 도망치듯 여기까지 왔을까'

미움도 원망도 용서도 이젠 내가 결정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후회하며 살아야 할지 다시 일어서야 할지의 선택도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돌다리 위에 있는 내가 저 아래 개울물에 비친 그림자의 나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오늘의 내 모습을 가슴에 묻었다. 하늘 한번 보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날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사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길 바라며 응원해주는 사람, 떨어져 있을 일주일 동안 많이 보고 싶을 그 사람을 생각하며 다시 숲길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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