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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Sep 04. 2022

온순溫順 : 순하여 따뜻한 손편지

글자들의 아름다움

 오후 손편지를 건네받았다. 어머님 소식 늦게 들어 장례식장 못 가서 미안타 하시며 건네주신 편지와 부의를 받았다.

  

 엄마와 같은 해 같은 달 태어나신 35년생 장로님. 어렵고 곤란한 교회 이런저런 '사태' 있던 십여 년 전 꼿꼿하게 우리들 앞에 서 계시던 장로님. 이제 조금 야윈 몸으로 환히 웃으시는, 얼굴 검버섯조차 품위 있으신 장로님. 얼마나 받는 이를 갸륵히 여기는지 그 맘  가득 편지에 담았다. 호상이니 맘 편안할 것. 장로님도 아내 권사님도 덤으로 산다고 편히 생각한다시며  어머님 시집에서 이 한 문단 손수 골라 적어주셨다. 절절히 마음에 닿았다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만
떨리는 마음으로 부르고 싶은 말
사랑의 다른 이름
당신


참 좋은 이 말을 들을 귀도
받을 손도
아, 멀리멀리 사라져 버렸네

   (엄마의 시집  '일곱 빛깔 보석함'  p.54 '당신이라는 말' 부분  라이프러리 2022 )


정갈한 마음 온전히 전해져 읽는 이의 마음도 순하여 따뜻해진다.

  전화를 드렸다. 가을 와서 선풍기 집어넣는 다시며, 내년에 당신이 이 선풍기를 꺼내 틀어볼 수 있을지 장담 못하는 세월을 살아간다  하신다. 담담히 말씀하신다. 곧고 찬찬히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고, 권사님이랑 산책 많이 다니시라고, 그 연세에 손수 운전하시는 분 많지 않다고, 오래오래 잘 지내시자 했다. 고맙다고 헛헛이 웃으신다.


 마지막에 '寸志 넣습니다. 小禮를 大禮로 받으십시오'하신다. 부의가 지도 않았다. 찬밥 데워주는 아랫목처럼 따스한 글과 글자들이 잔잔하고 엄숙한 채 온 맘 헤집고 흐른다. 좋은 들이 많다. 그리울 분들이 가득이다. 부디 건강하세요, 두 분을 오래 생각하며 기도한다.

선풍기여, 부디 올해 만난 사람들에게 내년에도 얼굴을 보여주렴.

 남녘엔 '힌남노'라는 거대한 태풍이 온다는데, 스무 살 무렵 아버지한테 받은, 모나미 153 볼펜 꼭꼭 눌러쓰신 아버지 편지를 떠올리는 날이다. 동생들한테 식구들한테 잘하라고, 정신 차리라고, 어디 공장에서 밤 새 외롭고 쓸쓸히 버티고 견디니 너도 잘 해내라던 아버지 손편지 회한 속 떠올린다.

 그땐 어찌 그리 막무가내 멋대로 살았을까 싶은 후회들이 건너온다. 지금 잘해야 할 일들에게 눈을 돌린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가장 좋은 동생 좋은 오빠 좋은 형 좋은 삼촌. 세상은 온통 바쁘고 찬란한데 더 잠잠하고 더 단순하고 더 느리게 살아가는 날들 꿈꾼다.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아이들은 무사히 집에 들어오는가. 비는 그칠 기세가 아니다. 그래도 태풍은  지나간다. 아빠처럼 엄마처럼 우리들처럼 태풍도 그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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