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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Sep 29. 2022

너절하다 : 누추陋醜와 남루襤褸 그 너머의 부끄러움

  - 짜장면 먹다 만난 그 입들의 너절함

 아내랑 저녁 8시 넘어 짜장면 먹으러 동네 중국집에 갔다. 이층 식당 홀에는 손님 드물어 한 테이블에 있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참이슬을 시키는 목소리 듣고 쳐다보니 소주 대여섯 병이 한켠을 차지했다. 때마침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이 티브이로 중계되고 있다. 카메룬과의 경기다. 우리가 1:0으로 이기고 있다. 목소리들 크다.  응원인지 환호인지 비난인지 세 사람 앉은 테이블이 잔뜩 시끄럽다. 우리에게 지나치게 잘 들린다. 애써 듣지 않아도 쏙 들리는데, 난감하다.


 아쉬움과 실수에 연신 반응하던 남자 둘 중 크고 동그랗게 가슴 튀어나온 남자 입에서 쉴 새 없이 욕이 나왔다. '씨발'과 '병신'과 '새끼'가 아무 데나 붙고 떨어지고 추임새로 돌아다닌다. '욕설의 대중화'나 '욕의 일반성'이나 '대화 속 욕 섞어 말하기'다. 욕이 문장 속에 평범하여 놀랍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 서둘러 나가려 젓가락질을 재촉했다. 그때, 정확하지 않지만 '나상호'로 들었다. 상대방과 헤딩 경합 중 머리를 부딪혔는지 땅에 넘어져 한참 있다 일어났다.


 "쟤, 뚝배기 깨졌냐?" "존나 쎄게 부딪힌 거 같은데 뚝배기 갠찮나?"


 머리를 '뚝배기'로 부르는 소리에 눈이 확 커지며 심장이 빨라지고 전율이 일었다. 뭘까? 오래전 어디서 들은듯한 이 낯설고도 무참한 말. 왜 이리 속을 훑고 칼로 베는 느낌을 주는가. 일베들의 용어였던가. 그들이 일베 건 뭐건 관심 없지만, 사람의 머리를 깨질 수도 있는 뚝배기 그릇이라 부르는 건 차마 못할 일 아닌가. 어찌 저리도 스스럼없이 말하고 듣고들 있는가. 정상의 범주라면 주변을 돌아볼 생각도 하고 목소리 낮출 줄도 알겠지만, 이미 저들은 벗어났나 보다.


 말은 온전히 그 입 싣고 다니는 몸의 1차적 표현이다. 어쩌랴, 타고난 것은 아니되, 이미 제 살갗만치 정겨운 저 해지고 낡은 옷들. 다 아는데 그 옷의 주인만 모른다. 저들은 벌레와 쓰레기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 옷들을 겹으로 덧입었다.

얼마나 고운가,  저 환한 손과 입과 살갗들

 다음 날 하프 러닝 해야 돼서 탄수화물 잔뜩 넣어주고자 일부러 찾아간 짜장면 집에서 맞이한 험하고 추한 서른 안팎의 입들을 생각한다.  볼썽사납고 성긴 감정들이야 꺼내놓고 바라보면 순간 사라진다. 오래 묻어둘 일도 꺼내어 다시 볼 일도 없다.


 '너절하다'


 그 한 남자의 욕설들과 '뚝배기'를 듣고 떠오른 단어다. 너절하다. 얼마 전, 북한 김정은이 이것저것 향해 너절하다 했다. 진짜의 너절함을 모르나 보다. 모든 곳에서 서로들 너절한 채 아닌 척한다. 냄새까지 풍기는 데 전혀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날들. 사람은 너절한 옷을 입을지언정 태도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이다. 태도는 언제나 입이 1,  표정이 2다.


 이렇게 하나의 작은 장면에 '너절함'을 꺼내놓고 말리고 쪼개어 깊은 자리에 싣는다. 누추와 남루와 초라의 말들보다 '너절하다'는 말은 직선으로 온다. 단순하다. 맞닥뜨린 감정의 오라기 하나 잡고 간단히 건너온다. 잘 매조지했다. 저장고에 잘 넣어둔다. '너절하다'는 말과 그 순간의 감정들.

이토록 환하고 맑은 하늘. 입도 몸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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