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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nce ko Oct 29. 2018

모진 사람 혹은 현명한 사람

불편을 감수하는 걸 강제할 수 없다. 

"쉼터 가고 싶어요."


어눌한 한국어로 보아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듯싶었다. 일행이 네 명이라고 했다. 마침 전화를 해 온 사람과 같은 국적 이주노동자 세이카가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실직으로 쉼터에 온지 사흘째였다. 세이카는 쉼터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전화를 할 때마다 굳이 방 밖에 나와서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인사성이 밝은 그에게 전화를 넘겨주었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라는 말이 딱 어울릴 법했다. 몇 마디 하는 것 같더니 전화를 끊고 돌려주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데 대해 스스로 만족해했는지 세이카는 만면에 웃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지 말라고 했어요. 자리 없다고”

“아, 네~~”


순간 당황했다. 전화를 건네주며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쉼터에 어떻게 올 수 있는지 안내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안내해 버렸다. 


지금 남자 숙소는 자리가 비좁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직장을 잃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같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조금만 양보한다면 말이다. 더구나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닌가.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 반면, 공간은 좁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 게 쉼터 생활이다.


“자리 없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는 세이카는 그런 불편이 싫었던 모양이다.


세이카는 모진 사람일까, 현명한 사람일까. 


“쉼터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열려 있다. 쉼터는 편해야 한다.”


두 명제가 충돌했을 때 ‘편해야 한다’에 방점을 둔 세이카는 어쩌면 쉼터 운영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비록 절반이긴 하지만,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 비하면 그는 현명한 사람이다. 쉼터는 그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게 맞다. 누군가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이럴 땐 웃어줘야 맘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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