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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ince ko Sep 15. 2021

도꼬자

도마뱀 꼬리 자르기 ㅋㅋ

1년 반 만에 찾은 세부 공항은 여전했다. 서린은 승무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를 나서자마자 훅하는 열기에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며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입국 심사대로 들어서는 곳까지 무슨 축제를 안내한다고 벽마다 걸린 장대 깃발과 각양각색의 가면들은 국제공항이라는 단어가 주는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공항을 찾은 사람들 모습 하나 하나만 봐도 말쑥한 정장 차림의 여행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서린은 아무리 휴양 관광도시라 하지만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개 찢어진 청바지에, 허름한 반팔 차림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었다. 


공항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그 모양 그 꼴이라서 그랬을까? 시골장터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서낭당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이미 낯익은 풍경인 사람에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만하지만, 화려함을 기대하고 방문한 이들 눈엔 좋게 봐 주려 해도 첫 인상을 구기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그나마 씁쓸해 하면서도 서린이 점수를 높게 치고 싶은 건 공항 구석구석 안내문에 영어와 함께 적힌 한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은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많은 한국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죽 인간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한글로 다 적어놓았을까. 인간들이 기본회화라도 했으면 저런 안내는 없었을 거야. 십년 배워도 말문 안 트이는 쓸데없는 영어공부, 여기 온다고 별 수 있겠나.”       

  

서린은 괜한 빈정거림을 어학연수를 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중고등학생들에게 눈빛으로 던졌다. 슬리퍼에 어깨가 드러나는 반팔 차림의 옷매무새를 보며, ‘짜식들, 정말 꼴사납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꼴사나운 꼴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남의 일에 왜 이리 참견하려 하나.’하며 입국심사대 앞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꽉 끼고 교태를 부리는 모양새가 한 눈에 신혼여행객임을 알게 해 주고 있었다. 둘은 입국심사대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한참을 실랑이를 하며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있어도 얇은 면옷이 등짝에 짝짝 달라붙는 날씨에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서린은 그들 뒤에서 귀를 세웠다.      

  

“입국신고서 어디 있어요? 비행기에서 나눠 준 노란색 종이!” 


출입국 직원이 답답한지 노란색 입국신고서를 들고 둘의 눈앞에서 팔랑거리며 타박하는 모습이 유치원생 앞에서 훈계하는 선생 모습 같아 보였다.  영어도 못하면서 용감하게 해외로 여행을 온 신혼부부 덕택에 뒷줄에서 한참을 소비하는 사이 해외 로밍을 하고 간 전화가 벌써 몇 번 울리고 있었다. 마중 나오기로 한 후배 은수였다. 굳이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온 걸로 봐서 요즘은 귀국을 앞둔 말년이라 여유가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입국심사대를 나오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수화물이 없는 관계로 바로 출구로 향하자, 은수의 가녀리고 다소곳한 모습이 멀리서도 한 눈에 확 띄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리는 긴 치마를 입은 그녀 곁으로 살짝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린은 2년 가까이 무더운 세부 뙤약볕 아래에서 산 사람치고는 민낯에도 여전한 뽀얀 피부에 가늘고 긴 눈을 갖고 있는 은수를 보며, 얼핏 보면 콜롬보 눈빛을 떠올리게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간 귀여운 눈빛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도착 시간 뻔히 아는데요, 뭘. 연착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시간 맞춰 와서 얼마 기다리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어요.”

“짐이 없으니까, 입국심사대에서 기다린 시간 말고는 달리 시간 뺏길 곳이 없잖아. 게다가 오늘은 사람이 밀리니까, 필리핀 이주노동자 전용 창구에서 심사를 하더라고. 덕택에 뒷줄에 길게 서 있다가 재빨리 빠져 나올 수 있었어. 이제 귀국할 때 다 됐지?”

“네, 세월 빠르다는 말 정말 실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제 할 만하니까, 가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어떻게 할 지. 하하하. 짐이 없으시니까, 우리 간단하게 그냥 커피숍에 가요.”

"그러지, 뭐. 특별히 갈만한 데가 있나?“

“아이고, 여기 세부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고 농담하시던 분이, 특별한 데 찾으세요? 그나마 에스엠몰에 있는 별다방이 제일 낫죠.”

“아이고, 이 나이에 다방이라고? 그래, 요즘 다방이 어떤지 한 번 볼까?”     

  

서린은 은수의 호탕한 웃음에서 곧 비올 것처럼 마냥 우울하고 말이 없던 그녀가 많이 변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늘 혼자이길 원했고, 벽에 눅눅하게 검은 이끼가 낀 집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그녀는 또래의 발랄함과 자신감을 회복한 정도가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도 배운 듯했다.      

  

다국적 기업도 필리핀에서 맥을 못 추게 한다는 영업망을 갖고 있는 대형마트인 에스엠몰은 입구부터 경비가 삼엄했다. 옆구리에 권총을 찬 무장 경비들은 평소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지 대체로 비만으로 보일만치 거구였고 말이 없었다. 경비는 일반적인 현지인들이 그러하듯 서린이 눈썹을 한 번 살짝 치켜 올려 인사 하자, 멜빵 가방을 메고 있는데도 검색 없이 들여보내 주었다. 반면 뒤따라오던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필리핀인들은 얇은 공책 한 권 들어있을 것 같지 않은 멜빵 가방을 검색당하더니, 검색대를 통과하고도 휴대 물품까지 검색당하고 있었다. 가방을 길게 어깨에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조잘대던 아이들은 어느새 얌전해져 있었다. 

  

에스엠몰 안에는 이중 검색을 당하면서까지 들어온 젊은 필리핀인들과 외국인들로 순간순간 충돌을 피하고자 어깨를 옆으로 하고 걸어야 할 만큼 붐비고 있었다. 이런 형편을 두고 발 디딜 틈도 없다고 할 텐데, 에스엠몰 안이 유독 붐비는 이유는 매장 복도에 놓인 가판대들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가판대에는 은제 귀고리와 머리핀 등의 악서서리가 대부분이었는데, 살 의향도 없이 값이 얼마인지 물어보는 구경꾼들로 인해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을 피하다 우연히 은수의 귀에 눈길이 갔다. 긴 생머리를 뒤로 질근 동여맨 탓에 그녀의 도톰한 귓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치렁치렁 귀고리를 한 현지인들과 달리 은수의 귀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귀고리를 걸기 위해 뚫는 그 흔한 구멍 자국조차 없었다. 이렇게 젊고 세련된 아가씨가 귀고리를 해 본 적이 없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 서린은 “은수, 귀고리 하나 사 줄까?”라며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했다. 

  

앞길 가기에 바쁘던 은수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받아쳤다. 


“귀고리 구멍도 뚫을까요? 호호호.” 


은수는 싫다는 말보다는 사람 속을 들여다보듯 받아치곤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걸어 나갔다. 서린은 그런 은수가 그저 멋이나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더 강해지고 야무져진 느낌이 들었다. 

  

북적이던 가판대를 지나자, 은수가 별다방이라고 말한 스타벅스가 나타났다. 별다방 앞에도 역시 허리춤에 권총을 찬 경비가 들고나는 사람들을 일일이 위 아래로 눈길로 훑고 있었다. 에스엠몰 입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별다방 무장 경비는 경비라기보다는 다방지기라고 부르기에 적합했다는 것이다. 푸른색이 특징인 별다방에서 경비는 유독 눈에 띄는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손님들이 커피를 마시고 무선인터넷을 즐기다 자리를 뜨면, 그 자리에 있던 빈 컵을 치우고, 건성건성 테이블을 훔치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별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서린은 은수의 볼과 눈빛에 얼핏 장난기가 서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은수는 주문하고 따라갈 테니 먼저 위로 올라가라며 서린을 뒤에서 밀었다. 커피숍 계단을 따라 올라간 이층은 아래층과 다름없이 귀가 찢어질 듯 질러대는 락 음악이 들리는 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노트북을 탁자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들로 꽉 차 있었다.      


“어어, 이게 누구야! 강석이 형!”     

 

맨 구석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있던 강석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세상 좁다는 생각을 하는 서린의 속내를 읽었는지 강석은 “세상 좁다는 말하려고 그러지?”라며 반갑게 서린의 등을 툭툭 쳤다.      


“이야, 지금 보니까 옛날 군 제대하고 입학했던 형 생각나네요. 주구장창 스킨 스쿠버 하시나 봐요.”

“야야, 그렇게 놀고먹을 팔자나 됐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에요. 여긴?”

“어쩐 일이긴, 나 같은 사람은 이런데 오면 안 되냐? 그러는 너는 어쩐 일이야. 나야 여기 사는 사람이고.”

“허허. 형 보고 싶어서 왔죠. 하하하”

“어머, 두 분은 여전히 으르렁대시네요.”     


주문을 하고 온다던 은수가 금세 뒤따라오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 이 형 와 있는 거 알았어?”

“제가 오시라고 했는걸요?”

“정말? 별 일이네. 두 사람 서로 웬수 아니었나?”

“웬수라고 하기엔 뭐하고, 그저 잘 맞지 않는 게 있었지. 지금도 역시 그렇고.”     

  

셋이 처음 자리를 함께 했던 건 지난번 세부 방문 때였다. 그때 강석은 멕시코를 거쳐 캐나다와 호주까지 돌고 돌다 이젠 정착하겠다며 필리핀에 막 정을 붙일 때였다. 서린이 대학 동기인 영식으로부터 강석이 필리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연락을 해서 만났던 자리에 이번처럼 공항 마중을 나왔던 은수가 함께 했던 자리였다. 그때도 역시 사람들이 북적대던 지금 별다방이었다. 


"어이, 스노우맨, 신수 훤해졌네. 자네도 여기 이년 살았었다며?" 강석은 서린의 이름을 갖고 놀리길 좋아했었다. 서린을 설인으로 발음하며 눈설 자, 사람 인자를 만들어 눈사람이라는 뜻의 스노우맨이라고 놀리곤 했다. 

"네, 형이 제철회사에서 쇳가루 먹을 때 저는 여기서 빵가루 먹었죠. 하하"

"빵가루? 엄살은, 마, 여기 사람들도 빵보다는 밥을 더 먹데.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대장노릇하기 좋아하던 강석은 여전했다. 강한 자존심 때문에 모르는 것을 누구에게 묻기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도움받기도 싫어하던 그는 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날 강석은 대학 졸업 후 근 10년만인데다, 그것도 해외에서 어렵게 만난 서린에겐 관심 없는 듯, 몇 마디 건성건성 건넨 후, 서린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손에 쥐고 온 신문에 눈길을 던졌다. 대학 동기생들 중 가장 잘나갔던 강석이었다. 그가 부도를 내고 멕시코로 갔다는 말만 듣고 있던 입장에서, 필리핀에서 만난 것 자체가 신기할 일이었는데, 대학 시절 깔끔하고 멋 내기 좋아하며, 약간은 시건방지던 강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건들거리는 표정에서 삶의 일정 부분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서린은 의아해 했었다.       

  

“꼬오∼리 자르기, 의혹만 키워?” 강석은 한글을 처음 읽는 사람처럼 굵은 글자로 된 제목에서 꼬리를 길게 잃더니, 안 봐도 훤하다는 듯 신문을 접으며 한 마디 했다. 


“꼬리자르기는 도마뱀이 전문인데, 그 친구들 필리핀에서 한 수 배웠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마뱀들이 꼬리 자르고 도망가는 것 보면 참 기가 막혀. 대단히 창의적이라고나 할까. 세상 살아가는데 귀신같은 감각. 뭐 이치를 터득한 거지. 거추장스러운 건 과감하게 자르는 법이란 걸 말이야.”

  

이때 별 말 없이 옆에 자리하고 있던 은수가 독백하듯 그러나 강석에게 들으라는 듯, 한마디 뱉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가면 가슴이 아프던데....... 잘린 꼬리가 덩그렁 방바닥에 지렁이 몸뚱어리 오그라지는 것처럼 뒹구는 걸 보면, 뭍에 오른 고기가 파닥파닥 헐떡거리는 것보다 찡하던데요. 제 몸뚱어리마저 외면할 만큼 절박하게 살아야 하는 도마뱀이 슬퍼지면서.......”

  

강석은 은수의 독백인지 독설인지 구분이 안 가는 한 마디에 이미 빈정이 상했는지, 영락없는 비지니스맨이라는 말을 듣던 예의 반듯했던 모습은 어디론지 감추고, 지지 않겠다는 듯 받아 쳤다. 


“아, 참 센티멘탈하기는 그러니까 봉사단이나 하지. 돈주앙이 사랑에 빠지고, 카사노바가 사랑을 멈춘다고 생각해 봐요, 그들은 이미 영웅이 아니에요. 범부일 뿐이지. 의미가 없는 거야. 과감하게 자를 땐 자를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인생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약지 않고는 제 앞가림 하나 못해요.”

  

어디서 주워들은 개똥철학인지 모르지만, 앞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들을 엮어내는 강석의 말주변은 대학 시절에 비해 훨씬 번지르르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예전의 당당하고 모범생 같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업 망했다더니 인생관마저 바뀌었나? 그러고 보니,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강석은 대학 새내기 때 이미 군을 제대한 예비역 해병 중사였다. 그런 탓에 강석은 학사장교 후보생이었던 서린마저 마냥 주눅 들게 했고, 동기들 내에서 늘 대장 노릇을 도맡아 하며 형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내 최대 철강업체에 취직했던 강석은 입사한 지 5년이 되던 해에, H빔과 강판 도매업을 시작한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했었다. 사업수단이 좋았던 그는 독립하자마자 군인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며 한참 주가를 올렸다. 한 해 현찰로만 수백억을 주무른다는 소문이 들리던 그가 거래하던 철강회사의 부도로 역시 부도를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도, 같이 일하던 종업원들과 거래하던 업체들에 자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마무리 했다는 말이 들렸었다. 그때 동기들은 강석은 역시 강석답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그에게 부도라는 것은 인생의 쓴 경험도, 남들이 한 번쯤 하는 그런 실패가 아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 늘 앞자리에 서 있던 그에게 패배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가 도마뱀 꼬리 자르기가 창의적이고, 세상 살아가는데 귀신같은 감각이니, 이치를 터득한 거니 등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센티멘탈하니까 봉사단이나 하지’라는 강석의 말에 은수는 감정이 상했다. 은수가 보기에 간만에 만난 대학 동기에게 신문이나 얻어 읽는 주제에 제 혼자 잘난 냥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며 팍팍한 인생을 질근질근 씹고 있는 강석은 그저 그런 시시한 인생 낙오자일 뿐이었다. 그나마 감정 상한 것을 감추며 자리를 지키는 건 선배인 서린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셋은 서로 딴 생각을 하며 신통하게 맛없고 비싼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달리 할 말이 없던 은수와 서린은 어색해 하고 있었다. 그때 강석의 눈길이 구부정한 등에 학자형의 중년 남성과 함께 들어오는 여자에게 돌아갔다. 게걸스럽게 훑어 올라가는 그의 눈빛에 빈정거림이 돌았다. 몸에 꽉 끼는 청색 핫팬츠를 입은 여자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팔뚝 털이 머리숱만한 남자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저 모양 저 꼴이니 나라가 뭐가 되겠어. 이 나라가 70년대만 해도 우리보다 잘 살았다며, 저렇게 식민지 근성을 버리지 못하니까, 저 늙은 양놈은 그 나이에 어린애 데리고 뭐하자는 짓인지, 원.”

“형은 이곳에 정착하려고 한다면서 이것저것 불만이 너무 많네요. 이곳 사람들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 않겠어요? 박박 기며 살아야 하는 우리보다 얼마나 낙천적이고 편한지 몰라요?”

“어쭈, 너 많이 컸다. 이 사람아, 그렇게 ‘케세라 세라’ 하고 사니까, 이 모양이라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러나. 이 사람들 오페어,  해외이주노동자 가족생활 평가지표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나? ‘외식!’, ‘영화 관람!’ 경제개발? 이 더운 나라에서 얼어 죽을 일이지!”     

  

외식과 영화 관람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그가 필리핀 해외이주노동자를 뜻하는 오페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강석은 제대로 들으려 하는 이가 없음에도 개똥철학을 이어 설파하기 시작했다. 


“쌔빠지게 고생하는 오페어만 일을 하지, 그 가족들이 일을 할 것 같아? 인간 기생충들만 득실거리니....... 봐봐. 제조업이나 자영업 꿈이라도 꾸나, 다들 니나노야, 니나 나나 놀자. 먹고 자빠지자 하니, 오페어들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빈털터리야. 그러니까 또 떠나지. 나라꼴이 뭐가 되겠냐고?” 

  

강석의 독설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가만있던 은수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아이들 학비도 벌고, 성공한 사람도 있어요. 이 나라 국민총소득의 10% 이상이 오페어 송금이라고 하잖아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예비 오페어들인데요. 저는 그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르쳐요.”

“야야, 이러다가 말싸움 나겠다. 다른 이야기나 하자. 형은 멕시코 간다고 하더니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차아암, 빨리도 물어본다. 내가 군대 제대하고 여기 일 년 동안 어학연수 왔었잖아. 그 인연도 있고, 이미 자리 잡은 매형도 있고 해서 나도 여기 정착해 볼까 해. 멕시코는 너도 알잖아, 그 사건, 그 때문에 일어서려던 순간 폭삭 주저앉았고. 보따리 싸들고 간 캐나다에서 시작했던 전화영어 서비스는 인건비 때문에 수지맞지 않아 거덜 냈고, 호주에서도 잠시 시도해 봤는데, 별반 다를 바 없었고, 염병할, 인간 강석에게도 세상에 만만한 게 없더라.”

  

'인간 강석', 그 자신만만하던 해병 중사가 누군가를 의지해 필리핀에 왔다고 말하는 것이 서린에겐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강석이 멕시코 사건이라고 한 건 그가 부도를 맞고 일 년을 쉰 뒤, 멕시코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한참 열풍이던 간장게장업체에 꽃게를 납품하기로 하고, 멕시코에서 선적을 준비하던 차에, 중국산 꽃게가 말썽을 일으켰다. 9시 뉴스에 중국산 꽃게에서 무게를 늘이려고 납을 넣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간장게장 시장이 순식간에 철퇴를 맞았다. 중국산 꽃게 파동으로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던 멕시코산 꽃게까지 동급 취급을 받으며 갑자기 소비가 줄어들면서 납품 계약 일보 직전까지 갔던 업체들이 한 발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강석은 이 사건이 국내 굴지의 업체에 꽃게를 납품하던 업체들끼리의 경쟁이 빚은 코메디라고 잘라 말했다. 


“기자 새끼가 쳐 먹고, 말도 되지 않은 기사를 까발리는 통에 업계 전체가 죽은 꼴이야. 말이 되냐고. 생각해 봐. 무게 늘린다고 납을 넣어? 무게 늘려 받을 돈보다 납 값이 더 나가는데, 기본적으로 기사가 될 거리냐고? 미친 새끼들.”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는 강석은 그때, 재물이 날개를 달아 달아나는 꼴을 봤다며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고 했다. 그렇게 멕시코 생활을 접고 필리핀까지 온 강석은 인생 막장을 걷는 사람 같았다. 하는 말마다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배알이 살살 꼬여있는 듯한 강석의 말투는 괜히 듣는 이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강석의 장황한 신세타령을 겸한 현지인 비판에 커피 맛도 입에 맞지 않는데,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서린만이 아니었다.  강석이 털어내는 독설이 불편했던 서린과 은수는 여독을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일년 반 뒤     


“요즘도 도꼬자 이야기 하고 다녀요?”

“도꼬자? 그게 뭔데?”

“형이 잘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

“아아, 그 얘기....... 은수 씨가 볼멘소리를 했나 보지?”

“그런 건 아니고,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네요. 일년 반이면 짧은 기간도 아니잖아요. 변한 구석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요.”

“나만 변했겠나, 은수 씨는 어떻고. 자네 말처럼 이곳 사람들 얼마나 낙천적인가? 처음에는 답답하고 못살겠더니, 이젠 그게 사람을 살게 하더라고. 나 지금 한국에 있을 때랑 비교하면 구멍가게하고 있지만, 맘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죽을 동 말 동 악을 쓰며 살았는지, 그리고 죽으려 했는지 모르겠어.”

“형이 꼬리를 잘 잘라서 그래요.”

“무슨 꼬리?”

“형 성질에 한국에서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으면 미련 남았을 거 아녜요. 부도 맞고 회사 정리하면서 부동산 팔아 직원들 챙겨줬다는 말 듣고, 역시 강석이라는 말들 했었거든요.”

“야, 그건 꼬리 자른 게 아니지. 자존심을 자른 거지.”     

  

‘자존심’, 강석이 뱉은 자존심이라는 말에 서린은 은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은수는 여자치고는 큰 키와 뽀얀 피부에 말수가 적고 낮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쳐들 때면 눈매가 날카로워 껄떡대던 남자들도 마음에만 두고 감히 접근하지 못해 하던 꽤 인기 있던 대학 도서관 사서였다. 자존심 강한 은수의 마음을 두드린 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하자, 대학원에 학적만 올려놓고 빈둥거리던 도서관장의 아들, 준수였다. 준수는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학을 준비한다며 도서관을 들락거리다가 사서로 일하던 은수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은수에게 있어 부모 등골만 휘게 하는 백수 처지나 마찬가지인 준수가 눈에 찰 리 만무했다. 게다가 가두리 양어장을 하다 태풍으로 집단 폐사하는 통에 빚만 늘어난 아빠를 대신해 남동생을 거두고 있는 은수에게 연애는 지나친 호사였다. 

  

준수는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은수에게 괜히 마음이 끌리는 걸 감출 수 없었다. 매일 은수가 퇴근할 무렵 책 한 권을 들고, 대출을 핑계로 수작을 걸어보려 했지만, 준수는 그 방면으론 초짜였다. 대출 기한만 확인하고, 책을 받아들고 은수의 앞을 떠나기에 바빴다. 한 학기가 다가고 겨울방학이 다가올 무렵, 준수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도서관 직원들이었다. 개관 기념식을 마치고 도서관장인 준수의 아버지가 직원들을 초대한 자리였다. 그 속에 은수가 있었다. 은수는 말수는 없지만, 손놀림은 쟀다. 준수의 아버지는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식탁을 정리하는 모양새가 야무지게 살림살이를 해 본 여느 주부 못지않다며 은수를 추켜세웠다. 그 날 이후 준수는 은수에게 하루 한 권의 책만 빌리지 않았다. 월요일마다 원서를 포함해서 다섯 권씩 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책을 다 읽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유학 준비한다고 영어만 공부하기에도 빠듯한 준수였다. 그런데도 준수가 대출할 필요도 없는 책들을 빌린 이유는 그저 열심히 공부한다는 인상을 은수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가끔은 대출한 도서를 반납하지 않고, 또 다른 대출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은수는 쪽지를 적어 자신의 책상 말미에 붙여놓고는 대출을 해 주었다. 그럴 때면 준수는 도서관 2층 휴게실 구석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은수에게 갖다 주곤 했다. 그렇게 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은수가 도서관에서 일을 한 지 일 년이 지날 때쯤, 매일 저녁 퇴근길에 바래다준다며 준수가 기다리기 시작하면서 준수와의 만남은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은수 씨, 나 좀 봅시다.”

“네, 관장님.”

“으음.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아요?”

"........"

“우리 준수랑 만난다는 이야기는 진작 들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유학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준수랑 은수 씨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은수 씨가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거는 나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준수는 이제 유학을 가야 할 처지고, 그 뒷바라지를 은수 씨가 해 줄 처지도 못 되잖아요. 내가 알기로는 제 앞가림하기도 힘든 형편이라고 들었는데. 이만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믿어요. 아참, 준수는 오늘 밤 비행기로 떠나니 그런 줄 알아요.”      

  

은수는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준수와 한바탕한 터였다. 밑도 끝도 없이 출국일자가 잡혔다는 통보에 은수는 할 말을 잃었었다. 준수는 은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있었던 터라, 은수의 모든 것을 잘 이해해 줬다. 그래서 집안의 가장 아닌 가장 노릇하며 헉헉거리던 은수는, 그나마 기댈 언덕이라고 여겼던 준수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곰팡내 팡팡 나는 반 지하 자취방에서조차 몇 달간 행복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붙잡아 주던 준수가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준수는 엄마들 치맛바람과 다를 바 없는 엄한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꼬리 내리는 마마보이였다. 준수가 은수에게 남긴 거라곤 미납된 도서 다섯 권과 자살에 대한 유혹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돌파하기에 은수는 너무 여렸다. 준수가 떠난 이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은수가 정신을 차린 건 양어장 사업 실패 이후 다시 일어서려고 대출을 얻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길에서였다. 아버지를 웃고 울게 하고, 또한 아버지만 바라보던 가족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고향 바다 앞에서 은수는 아버지가 그렇게 강한 분인지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두리 양어장까지 가는 길에서 은수는 바람 한소끔 풀어 헤쳐 펄썩펄썩 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어릴 적 남동생과 대나무 구덕에 호미를 들고 갯가에서 놀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양어장에서 혼자 일하던 아버지는 은수의 뜬금없는 등장에 바삐 손을 놀리시더니 “어여, 가자, 하늘이 더위 먹었는지 소낙비 내리려나 보다. 이렇게 짠내 묻은 갯바람이 급히 불면 비가 온단다.” 하시며 은수의 등을 떠밀었다. 

  

사료 포대를 들고 있던 은수 아버지의 손은 늘 그렇듯이 반질반질하고 윤기 있는 손은 아니었다. 굵은 손마디마디는 거칠고 투박하기가 오랜 파도에 구멍 숭숭 난 따개비가 달라붙어 있는 바위 덩어리 같았다. 젊어서 여럿 울렸다는 소릴 듣는 큰 눈에 각진 얼굴을 한 은수 아버지의 얼굴도 이제는 누렇게 떠서 양어장 구석구석을 둥둥 떠다니는 파래처럼 생기가 없었고, 주름살이 밭이랑보다 깊게 패여 있었다. 한 평생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살아왔을 그가 몸에 걸친 것이라곤, 민방위 모자에 색 바랜 위장복뿐이었다. 그런데도 은수는 아버지가 초라하다든가, 궁색해 보이지 않았고, 그 당당함에 멈추지 않는 파도소리 같은 힘을 느꼈다. 부녀가 돌아오는 길, 갯바위 아래 슬금슬금 눈알을 삐죽거리던 게들이 잘그락 잘그락 파도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다 큰 자식이 비 맞을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이 구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은수는 물었다.      


“왜 다시 양어장 하세요? 이제 그만하셔도 굶어죽지 않잖아요.”

“에끼, 녀석아, 굶어죽지 않는다고 일 하지 말라니 말이 되냐. 사람이 땀을 흘리지 않고 먹고 살면 그게 바로 죽은 목숨이다. 이 바다가 이 이 애비 키웠고, 너희들 키웠다. 숨이 붙어있는 한 벗해 줘야 하지 않겠니?”

“그러다가 지난번 태풍 때처럼 폐사되면 빚만 쌓이고, 죽도록 일해도 부채만 쌓이는데 질리지도 않으세요?”

“농사짓는 사람이나, 뱃사람이나, 송충이는 솔잎 먹어야 한다고 안하든. 니들 다 컸는데 무슨 걱정이 더 있겠니. 걱정마라, 부채까지 떠안으라고 하지 않을 테니, 허허허.”     

  

은수가 ‘부채까지 떠안으라고 하지 않겠다.’던 아버지 대출 문제로 수협에 갔다가 서린을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1.5톤짜리 파란색 반 트럭에 깊숙이 허리를 짚어 넣고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은수는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검게 그을린 서린을 본 은수는 서린이 고향에서 그저 그렇게 사는 줄로 생각했다. 모교에서 교생 실습을 할 때, 서린은 은수의 남동생 반을 맡았었다. 그 인연으로 친해진 은수는 서린에게 있어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던 몇 안 되는 여자 후배였다. 그때 은수는 서린에게 교직에 몸을 담을 거냐고 물었었고, 서린은 그럴 뜻이 전혀 없음을 밝혔었다.      


“오빠 그럼 양어장 해 보는 건 어때?”

“어? 양어장? 그런 건 생각 못해봤는데. 군 제대하고 직장 좀 다니다가 필리핀에 갔다 왔거든.”

“어, 그거 해외봉사단인가 뭔가 하는 그거죠?”

“맞아, 그거야. 어떻게 잘 아네.”

“그럼요, 제가 이래 뵈도 대학도서관 사선데, 그 정도 정보야 없겠어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데 가면 안 돼요?”

“글쎄, 왜 없겠어. 한 번 시도해 보지, 그러니?”     

  

은수가 우연하게 서린을 만난 후 가슴에만 묻어뒀던 해외봉사단 지원을 한 것은 그 뒤로 일 년이 더 지나서였다. 파견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이 해외봉사단원을 모집한다는 홍보 전단을 도서관 게시판에 붙이던 은수는 문득 자신이 지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은수는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환갑을 앞둔 아버지도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는데, 자신은 너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집요강을 살피던 은수는 순간 난감해졌다. 사서라는 직업을 갖고 해외봉사단원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은수는 자신이 붙잡고자 했던 희망이라는 단어가 너무 막연하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은수는 한편으로 그동안 자신이 절박하게 희망을 붙잡으려 해 본 적도 없고, 절망이라는 단어 앞에 노출된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별것도 아닌 걸 갖고 자신에게 메스를 가하며 자해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은수는 다시 한 번 모집 요강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다행히 교직을 이수하며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과정을 이수했던 것이 도움이 되어 한국어 분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서류 접수를 마치고 난 은수는 맨 처음 서린에게 전화로 그 소식을 알렸었다. 그때, 서린은 괜히 바람 집어넣은 것이 아니었는지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나저나 넌 여기 웬일이냐? 지난번에 왔던 그 문제냐?”

“네, 한국 사람들이 꼬리 자르기하고 간 실태 조사 좀 하려고요. 예전에 봉사단원으로 있을 때 대학원 진학하면 논문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졸업 논문을 쓰려니까 진도 나가는 게 쉽지 않네요. 형이 전공이니까, 좀 도와줘요.”

“그래요, 저야 늘 같은 부류의 사람만 만나지만, 강 사장님은 사업을 하시며 온갖 사람 다 만나잖아요. 그러니 훨씬 발도 넓고 현지인들 바닥도 잘 아시잖아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비행기 띄우나. 그 문제 심각한 건 나도 알지만, 나 같은 사람은 성질 더러워서 그 꼴 그냥 못 봐. 실태 조사고 뭐고 간에 주먹 먼저 나오지.”

“그나저나 형, 예전보다 많이 편해 보여요. 화폐가 쏠쏠한가 봐요?”“화폐? 허허. 그런 거 잊은 지 오래다. 돈 버는 사람이 이런 자리하겠니?”     

  

대학졸업 후 학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이주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서린은 지금 은수가 활동하고 있는 기관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쳤었다. 그렇게 활동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원 진학을 했던 게 재작년이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부터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것이 있었다. 2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수많은 코피노들 문제였다. 서린이 대학원 졸업 논문을 위해 필리핀을 찾은 이유 역시, 강석이 주먹부터 나갈 거라고 말하는 부류들이 도마뱀 꼬리 자르듯 버리고 간 한국계 필리피노들 실태 파악을 위해서였다.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는 느낌을 받으며 서린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강석과 헤어졌다. 에스엠몰을 나오며 서린은 은수에게 바다로 갈 것을 제안하며 성큼성큼 몰 옆에 위치한 지프니들이 주차해 있는 정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스엠몰 출구로부터 기역자로 꺾이는 곳에 위치한 정거장까지는 기껏해야 이백여 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은수는 정거장으로 향하던 서린에게 고개를 뒤로 하며 눈짓을 주더니, 지나가던 지프니를 간단하게 세웠다. 그렇게 지프니를 세운 은수는 운전석 옆으로 서린을 밀어붙이고, 비좁은 자리를 비집고 올라탔다. 이럴 때 하는 말이 ‘현지인 다 됐네.’라는 말일 것이다. 운전기사는 슬리퍼마저 거추장스러웠는지 맨발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꼬깃꼬깃 돌돌 만 냄새나는 지폐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우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돈을 받기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기도 하며, 운전하는 모습을 한두 번 봐 온 것도 아니지만, 서린에겐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었다.      


“맨발로 운전하는 거 처음보시는 거 아니잖아요.”

“음. 그래도 신기하네.”     

  

서린은 은수가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숫기가 없어 말도 제대로 못하던 그녀의 변신은 묘한 중성적 매력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지프니 운전석 옆 좌석에 두 사람이나 앉은 탓에 치마를 입은 은수의 허벅살로부터 무릎까지 맞닿아 질퍽하게 묻어나는 땀에도 서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었다.      


“강석이 형이 변한 거 같더라. 우리가 학교 다닐 땐 동기생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단 있었는데.”

“흐훗, 안 그래도 사고 한 번 있었어요. 강 사장님 어학연수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필리피노 임신시켜 놓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그 학생, 강 사장님한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소문이 대단했었어요. 강 사장님, 그 일로 어학원 접었잖아요. 이상했던 건 같은 업종에 계신 분들이 강 사장님을 더 몰아세우는 거 있죠. 깡패가 사업하는 통에 물 다 흐리고 있다고. 그런데 그 일이 있고난 후에 뵀을 때,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군에 있을 때 월남전 참전 용사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환멸을 느꼈다고. 전쟁 중이던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세상이 지긋지긋하다고요.”“월남전? 라이 따이한 이야기군.”     

  

강석은 군에 갔다 온 이들이 의례하듯 남들 다 하는 군대 이야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친한 동기생들과 술을 할 때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만한 우울한 역사 이야기를 허허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풀어내던 이야기보따리 단골 메뉴엔 어떤 이유인지 언제나 ‘라이따이한’이 있었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다낭에서 미군들 따까리 노릇하던 헌병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베트남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은 거야. 그런데 전쟁 말미에 미군들이 뒤꽁무니 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니까, 매일 밤 이 여자가 묻는 거야. 이 여자가 이렇게 묻지 않았겠어? 귀국할 때 자기 데리고 갈 거냐고? 그래, 헌병이 뭐라 답했겠나? 마, 듣자마자 우리말로 ‘웃기네!’라고 답했지. 그래서 이 여자가 물었지. ‘웃기네!’가 무슨 뜻이냐고? 그런데 이 헌병 놈 대답이 가관이야. ‘아, 그건 꼭 데려간다는 뜻이야.’라고 한 거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던 이 여자가 말이야, 미군들이랑 한국군들이 엘에스티라고 상륙함 타고 퇴각하는데, 군항에서 한 손엔 애를 안고, 한 손엔 손수건 들고 소리쳤다는 거 아냐. ‘아저씨, 웃기네! 웃기네!’ 그 꼬락서니 보고 있던 군바리새끼들 역시 키득키득 거리며 답했다는 거 아니겠어. ‘아줌마, 웃기네!’ 지랄 같고, 이 전설 같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우리 선배들 입에서 무용담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월남전 참전 용사였던 선배들의 무용담을 전설 같고, 지랄 같다고 하던 강석의 의협심은 라이따이한 문제를 늘 가슴에 새기게 하고 있었다.       


“그런가 봐요. 나름대로 그런 부분에 의협심이랄까, 이해가 빠르시더라고요. 강 사장님, 사업 여러 번 말아먹고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게다가 그 사건까지 났으니,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더라고요. 덕택에 어학원 말아먹고 지금은 쌀장사를 하시는데,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지셨어요. 이젠 한국 사람들이 도마뱀에게 꼬리자르기를 배워야 된다는 말씀 안 하세요. 호호호.”     

  

안 봐도 눈에 선한 그림이었다. 서린은 ‘역시 강석이다’는 생각을 하며 은수의 근황을 물었다.      

  

“한 일 년 정도 더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여긴 더워서 상처가 나면 덧나고 아물 것 같지 않지만, 오히려 빨리 아무는 땅인 것 같아요. 도마뱀 꼬리가 잘려도 금방 다시 나는 것처럼요. 그동안 안으로만 오그라들며 살았는데, 이곳에 와서 저보다 더한 상처 안고 사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어요. 상처 안고 사는 사람들 속에 살다보니까, 면역이 생겼나 봐요. 하하”     

  

서린은 은수가 동강난 도마뱀 꼬리가 다시 옴질옴질 기어 나오는 것처럼, 상처를 회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세월이 약이 아니라, 상처 속에 이미 면역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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