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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믿음과 상상 Jun 13. 2023

장군 갈비의 추억(수필)


꽤 추운 겨울이었다.

중3이었던 나는 고입 연합고사를 보기 위해 중곡동에 있는 대원고등학교에 갔다.

그 당시 형이 나를 데리고 갔던 것 같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힘들게 일을 해서, 그 당시 무직이었던 나보다 10살 많던 형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형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에 대학 총학생회장을 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경찰에게 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고 구속됐다가, 풀려나 무직으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것은 내 기억이니 아마 뭔가 했을 수도 있다. 형은 전과가 있어 군대도 가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사면이 되어, 직장을 가지게 됐다.


시험장인 대원고등학교 교실은 따뜻했다. 교실 한가운데 석탄 난로가 화력을 내뿜으며 교실을 데우고 있었다. 나는 같은 학교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 친구는 우리 중학교에서 싸움을 무척 잘했던 친구였다. 바로 옆의 옆자리에 건대부중 싸움 1 짱이 있었다. 중3인데도 어깨가 벌어지고 흰머리가 나 있었다. 우리 학교 싸움 잘하던 친구가 너무 왜소하게 보였다. 시험장에는 감독 선생님이 두 분이 들어오셨다. 두 분 중 한 분이 건대부중 1 짱에게 오더니 학생이 맞냐며 얼굴과 수험표를 확인했다.


긴장되는 시험 시간, 너무 크고 두꺼운 잠바가 불편했다. 벗으면 춥고 입으면 덥고

이 잠바는 엄마가 큰맘 먹고 사준 비싼 잠바인데, 오래 입으라고 너무 큰 것을 사줬었다.


시험이 끝났다. 교정을 나오는 데, 눈이 보슬보슬 내린다.

부모님들과 함께 집을 향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러나 난 익숙했다.

부모님이 오시지 않는 게….

초등학교 졸업식에도 일하느라 바빠서 오지 못했다.

멀리서 형이 손을 흔든다. 형은 담배를 피우며 나를 기다리다 신문을 건넨다.


“여기에 답지 있으니까, 맞춰봐. 시험은 잘 봤어?”

나이 차이가 많은 형이 약간 어색하다. 형보다는 삼촌 같은 느낌이다.

“그럭저럭, 모르는 건 없었어”

“가자. 밥 먹으러”


형은 나를 데리고 굉장히 커 보이는 식당으로 향한다. 입구에 ‘장군 갈비’라고 쓰여있다. 내심 돈이 없는 형이 걱정된다. 형은 메뉴를 보더니 불고기를 시킨다. 그리고 맥주도 시킨다. 아마 엄마가 돈을 주셨던 것 같다.

가난한 형편에 우리만 이렇게 비싼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도 불고기는 너무 맛있었다. 밥을 먹으며 채점을 하는데, 1~2개씩 실수로 틀렸다. 아쉽다. 다 맞았는지 알았는데….

형은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음식점 안에서

그 시절엔 그랬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대학생이 됐다. 나는 과외를 하며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은 1~2년마다 이사를 했었고, 어느덧 장군 갈비 근처 중곡동에 살게 됐다. 누나들은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고, 형은 지방 고등학교 교사로 일을 했다. 가족의 대소사에 형은 집이 멀어 못 오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에 살던 누나들과 부모님과 함께 살던 나만 참여를 했다. 부모님 생신이면 나는 누나와 조카와 부모님을 모시고 장군갈비를 갔다. 과외로 번 돈으로 불고기가 아닌 소갈비를 시켰다. 돈은 항상 내가 냈다. 장군 갈비의 소갈비는 너무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부모님과 조카들에게 사주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조카들은 너무 많이 먹다가 토를 하기도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나만 같이 살게 됐다. 나는 고집이 센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이 싫어 따로 독립했다.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고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중곡동으로 향한다. 집이 허름하여 장군갈비에서 만난다. 아버지와 예비 와이프에게 장군 갈비의 소갈비를 사준다. 아버지는 예비 와이프가 몸집이 작아 못 마땅한 눈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느덧 내 아이들이 셋이나 태어났다. 나는 서울에서 밀려 경기도에 살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장군 갈비를 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가끔 능동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으나, 장군 갈비 소갈비 가격이 올라 사 먹을 엄두를 못 냈다. 그래도 한 번은 가야지 하고, 1년에 한 번씩은 장군갈비를 검색했다. 그런데 소갈비는 매년 가격이 올랐다. 가격을 확인하고 포기한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과 장모님 포함, 6명이라 여기서 먹게 되면 아이들 학원비 2~3개월치가 날아간다.

그렇게 매년 포기하다가 아이들이 훌쩍 컸다. 예전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조카들 데리고 어떻게 갔을까?

물가가 올라서 그렇지 그 당시에도 상당히 부담되는 가격이었을 텐데..


형제들과 조카들, 부모님은 사드렸는데, 정작 내 자식들은 사주지 못했다.


올해는 용기를 내어 가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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