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정서진 라이딩

영실은 중린이 첫 정모로 정서진 라이딩을 기획했다. 아라뱃길을 따라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코스는 평지 위주라 중린이들에게 최적이었다.


영실이 짠 코스는 아라뱃길 남쪽을 따라 정서진 인근의 경서 1 공원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곳 편의점에서 간단히 보급을 하고, 다시 길을 건너 아라뱃길 북쪽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북쪽 길에는 인공 폭포가 있어 사진을 찍기 좋았고, 근처에는 꽤 맛있는 두부 전문점이 자리해 있어, 식사와 막걸리를 곁들이면 연배 많은 선배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코스를 따라 더 가면 현대 아웃렛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강변을 바라보며 야외 의자에 앉아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들이 즐비했다. 영실은 지도를 펴 놓고 꼼꼼히 동선을 검토하다가 휴대폰 카톡 알림음을 들었다.


“형, 저 재형이에요. 언제 얼굴 한 번 볼 수 있어요?”

재형은 영실의 대학 후배였다. 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얼굴을 본 지도 꽤 오래였다. 반가운 마음에 영실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재형아, 오늘 바로 보자. 우리 자주 가던 참치회집 있잖아. 공원길 끝에 있는 곳... 그래, 거기서 보자.”


만원 지하철에서 내린 재형은 무겁게 처진 몸을 이끌고 공원길로 발을 옮겼다. 하루를 간신히 버텨낸 직후라 술집까지 이어진 길이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서울 외곽의 넓은 집.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했지만, 출퇴근 세 시간은 매일같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회사에서는 50대 선배들이 하나둘 퇴직 압박을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몇 년 뒤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을 미래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안 사정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원비는 더 늘어났고, 아내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 서로 낯선 사람처럼 지냈다.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거실에 앉아 맥주를 따르다 보면 아이들 공부에 방해된다며 아내의 눈총이 돌아왔다. 그럴 때면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 속 영상에 도망쳤다. 술도 몰래 마셔야 했다. 소주를 큰 컵에 따라 물처럼 들이켜고, 빈 병은 아이들 모르게 재활용통에 감추듯 버려야 했다.


공원길을 벗어나자 약속 장소가 보였다. 영실과 자주 가던 2층 참치회집이었다.

“어서 오세요!”

사장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술집 안에는 영실이 보이지 않았다. 재형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회무침과 맥주를 시켰다. 맥주 거품이 유리잔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이 머물렀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고, 건너편 1층 상가 앞에서 한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비를 피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재형은 무심코 잔을 기울이며 그 여자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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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대리, 먼저 퇴근해.”

“네, 부장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층 현관에 서자 눈앞에 폭우가 쏟아졌다. 그때였다. 비에 젖은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은이었다.

“지은 씨 아니세요?”
“어머, 대리님. 퇴근하세요?”
“저도 지하철로 가는데, 우산 같이 씁시다.”

좁은 우산 속에서 지은의 어깨가 스쳤다. 젖은 머리칼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샴푸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 작은 향기가 온몸을 흔들었다.


지하철을 함께 타고서야 서로 집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알았다. 자연스럽게 술집에 들어섰고, 잔을 부딪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회사 일 힘들지 않아요?”
“아뇨. 단순 업무라 괜찮아요.”


앳된 얼굴, 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빛. 그 웃음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더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무엇보다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었다.


그날 이후 퇴근 시간을 맞추듯 함께 나왔다. 집 앞까지 걸으며 농담을 주고받았고,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기도 했다. 어느 날은 맥주잔을 나누다 무심코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놀란 듯했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그 순간의 전율은 아직도 선명했다.

첫 키스. 숨이 막히는 듯한 설렘. 그리고 결국 그의 자취방에서 서로를 안았다. 지은과의 시간은 언제나 뜨거웠다. 만나면 더 원했고, 떨어지면 미칠 듯이 그리웠다. 한여름 같은 열정이 이어졌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까지 나아갔다. 그때는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내와 마주 앉아 있어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고,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집 안에는 정적만 흘렀고, 그 속에서 서로 멀어졌다. 결국 ‘넌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원망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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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비에 젖은 영실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아, 형. 오랜만이에요. 비가 오니까 첫사랑이 생각나서요.”
“첫사랑이면 지금 네 와이프 아니야?”
“맞아요. 첫사랑과 결혼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진짜 사랑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영실은 쓴웃음을 지으며 재형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야, 형 같은 노총각도 사는데, 결혼해서 애 둘 있는 놈이 복에 겨워서 무슨 소리냐?”

영실이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왜 보자고 했어?”

“형, 아직도 자전거 타세요?”
“그럼. 나 이제 중린이 대장이다.”
“중린이 대장이 뭐예요?”
“자전거에도 계급이 있어. 실력에 따라 자린이, 중린이, 고린이. 중린이 대장은 중간 단계 타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라는 뜻이지.”
“형, 대단한데요. 저도 자전거를 배워보려고요.”

영실은 의아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같은 취미를 함께한다는 사실에 묘한 기쁨을 느꼈다.


“그래? 좋지. 내가 가르쳐줄게. 근데 왜 갑자기?”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이러다 병 날 것 같아요. 계속 평가 압박에 시달리다 보니... 어제도 50대 선배 퇴직 자리 갔다 왔는데, 몇 년 뒤엔 제 차례겠구나 싶더라고요.”
“대기업이 다 그렇지 뭐. 잘 버텨야 돼.”

“자전거를 타려면 일단 자전거를 사야죠?”
“그렇지. 근데 주의해야 할 게 있어. 대부분 처음에 괜히 여러 번 사면서 돈 낭비하거든. 단 두 번만에 끝내야 해.”
“두 번만에 끝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처음엔 무조건 중고를 사는 거야. 내가 직접 골라줄게. 100만 원 대면 꽤 괜찮은 걸 살 수 있어. 일단 디스크 브레이크 달린 걸로, 프레임 하고 휠셋은 카본. 구동계는 기계식으로. 이렇게 시작해서 나중에 실력 오르면 중고로 500~1000만 원대 최고급 전동식으로 업그레이드하면 돼.”
“신품은 훨씬 비싸겠죠?”
“최고 사양은 2000만 원이 넘고, 웬만한 것도 500은 줘야 해. 괜히 2~300짜리 애매한 신품 샀다간, 결국 후회하게 돼. 나도 그랬으니까.”

재형은 그 말을 들으며 답답한 일상 속에서 뭔가 돌파구가 열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좋아요. 형이 골라주세요.”
“이번 주에 형이 정서진 답사 라이딩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평지 위주라 초보한테 딱이야. 경치도 끝내주고.”


주말, 드디어 정서진 답사 라이딩.

“형, 오늘 처음 타는데 괜찮겠죠?”
“괜찮아. 넌 클릿 신발도 아니잖아.”
“클릿이 뭐예요?”
“자전거 페달에 신발을 고정시키는 장치야. 정차할 때 잘 못 빼면 넘어지니까 익숙해진 후에 쓰는 게 좋아. 페달링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도와주거든.”


영실은 수신호 몇 가지를 알려주며 재형을 이끌었다. 곧 아라뱃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형, 여기 정말 끝내주는데요?”
“그렇지. 이 맛에 로드를 타는 거야.”

강바람이 땀을 씻어내렸고, 넓게 열린 강은 바다와 이어져 있었다. 자전거 도로를 감싸는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로드 자전거는 힘도 덜 드는 것 같아요. 그냥 미끄러지듯 나가네요.”

“맞아. 근데 초보는 페달링에 집중해야 돼. 가벼운 기어로 회전수를 빠르고 끊김 없이. 로드는 장거리를 타니까, 근육보다 호흡으로 타야 해.”


잠시 후 두 사람은 경서 1 공원 편의점에 도착했다. 음료로 목을 축이며 영실이 물었다.

“어때? 대략 20킬로 탔을 텐데.”
“재밌어요. 근데 형이 골라준 자전거 진짜 가볍네요.”
“그렇지. 7킬로대 카본 프레임에 울테그라 급 구동계야. 차로 치면 제네시스 급이지.”

재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길을 건너 북쪽 아라뱃길로 들어서며 영실이 제안했다.
“재형아, 이참에 우리 동호회 들어와라. 네 실력 내가 따로 끌어줄게. 자린이 모임 말고, 바로 중린이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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