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중린이 벙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흥행이었다. 무려 열두 명이나 모였고, 그 안에는 영실과 재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원이 늘어나자 영실은 결국 회장님께 전화를 걸어 SOS를 쳤다.
“회장님,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인원이 많아서 두 팩으로 가야겠어요. 그럼 대장이 한 명 더 필요합니다.”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응했다. 결국 선두조는 영실이, 후미조는 회장이 이끌며, 무리들은 아라뱃길을 남에서 북으로 달려 나아갔다. 강을 따라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이어졌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무리는 영실이 미리 답사했던 두부 전문점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영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후배랑 미리 답사를 했는데요, 여기는 두부김치랑 콩국수가 아주 맛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회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영실보다 나이가 많았고, 50~60대가 주축이었다. 83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홍이 먼저 소리쳤다.
“어이, 중대장! 막걸리 몇 병 시켜야지. 오늘은 첫 중린이 벙이니 좀 천천히 즐겨야지 않겠어?”
막걸리 몇 순배가 돌자 홍이 특유의 유쾌한 말솜씨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는 사람들을 웃기고, 동시에 이끌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내가 말이야, 여기 타이거 바이크 창단 멤버야. 지금은 전기 로드 자전거 타지만, 한때는 석대장 실력 정도는 됐지. 아, 맞다! 중대장, 오늘 여기 부부 회원 처음 보지?”
홍이 손짓하자 부부 회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하게 맞춰 입은 사이클 웨어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소 수줍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희는 5년 전부터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실력이 부족해서 고린이 모임에는 못 나왔어요. 이번에 중린이 모임이 생겨서 용기 내서 참석했습니다.”
영실은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부부가 함께 타시니까 정말 보기 좋아요. 근데 두 분이 주말에 이렇게 나오시면 자녀분들이 뭐라 하진 않으세요? 밥도 안 차려주고 나간다고.”
부부는 동시에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자녀가 없어요. 그래서 늘 같이 다니는 거죠. 서로 적적해서요.”
영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필요한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죄송해요. 괜한 걸 여쭤봤네요. 그래도 이렇게 복장까지 맞춰 입고 다니시니 참 보기 좋아요. 앞으로 좋은 코스로 자주 모시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홍이 영실을 조용히 불렀다.
“중대장, 저 부부는 아이가 사고로 죽었어.”
“네?”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거야. 서로 함께 이겨내려고. 그러니 굳이 묻지 않는 게 좋아.”
그 말이 지나가자, 영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부부에게 머물렀다. 서로를 살뜰히 챙기며 자전거를 정비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면서도 묘하게 슬펐다. 사랑과 상실이 동시에 배어 있는 풍경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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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퇴근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엄마는 식탁 위에 하얀색 예쁜 접시에 쌀떡볶이를 담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냄새는 어린 시절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던 향이었다. 나는 밀떡보다 쌀떡을 훨씬 좋아했다. 밀떡은 특유의 밀가루 냄새가 코끝에 남아 싫었지만, 쌀떡은 부드럽고 쫀득하며 깔끔했다. 그 맛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이거 내 거야?"
그러나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중간고사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후로 엄마는 나를 외면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풀이 죽은 채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아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그놈의 떡볶이, 지겹지도 않아? 언제까지 그걸 먹을 거야?"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젓가락으로 쌀떡을 집어 조용히 오물거릴 뿐이었다. 곧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더니 떡볶이를 안주 삼아 홀로 마셨다. 아빠는 못마땅한 듯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싸늘해진 공기 속에서, 나는 괜히 내가 시험을 망친 탓에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주눅이 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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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야! 오늘 노래방 갈래?" 단짝 친구 서현이 다가와 말했다.
"아니, 나 시험 망쳤어."
"그래도 시험 끝났으니까 놀러 가자." 예은이가 내 팔을 끼며 재잘거렸다.
"안 돼. 시험 망쳤는데 놀러까지 가면 엄마한테 맞아 죽을걸."
"야~ 너 외동딸이라며? 하나밖에 없는 딸을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서현은 휴대폰을 만지며 놀 곳을 검색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희는 몰라. 우리 엄마, 아빠 둘 다 스카이 나와서 나도 꼭 거기 가야 한다고 매일같이 압박해."
"그럼 우리 둘이 갈까?" 예은이와 서현은 시선을 교환했다.
"좋아!" 두 친구는 금세 신나서 계획을 세웠다.
나는 뒷걸음질 치듯 자리를 떴다. 뒤에서 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지야! 정말 안 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수학학원 앞에 서 있었다.
학원에 들어서자, 선생님이 놀라며 나를 맞았다.
"민지야? 웬일이야? 오늘 시험 끝났잖아."
"네... 근데 집에 가면 혼나서요."
나는 시험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60점.
선생님은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부족했구나. 너희 학교 시험은 늘 그렇지. 다시 풀어보자. 왜 틀렸는지 같이 분석해 보자."
나는 선생님의 말에 긴장이 풀렸다. 차분히 문제를 풀어보니, 신기하게도 시험장에서 틀린 문제들이 거의 다 풀렸다.
"선생님, 한 문제 빼고 다 풀었어요. 시험 땐 시간에 쫓기느라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 그래. 고등학교 시험은 일부러 변별력을 두려고 시간을 모자라게 출제해. 그러니 더 많이 풀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너무 낙심하지 마. 고1 땐 성적이 흔들려도, 꾸준히 하면 고2부터 충분히 오를 수 있어."
그 순간, 마음속 깊이 눌러앉아 있던 돌덩이가 스르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겨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열자마자, 엄마의 날 선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지금 몇 시야? 왜 전화는 안 받아? 오늘 시험은 어땠어, 몇 점이야? 시험지 좀 보여 줘.”
엄마의 목소리는 숨 가쁘게 쏟아졌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아빠도 인기척을 내며 거실로 나왔다.
“요즘은 고1 때부터 다 1등급을 받아야 스카이 간다는데, 민지 시험은 잘 봤어?”
엄마는 기다릴 틈도 주지 않고 내 가방을 확 낚아채더니 시험지를 꺼냈다. 붉은 펜으로 크게 적힌 점수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뭐야, 60점?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한 거니? 학원 다니면서 이 점수가 말이 돼? 공부한다고는 하고 휴대폰만 붙들고 논 건 아니야?”
아빠가 놀란 듯 엄마 손에서 시험지를 빼앗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런 걸 왜 틀린 거야? 이런 문제는 나도 풀겠다. 학원에 그렇게 돈을 쏟아붓는데 이게 결과야? 아빠는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혼자 공부했어.”
나는 그 말에 울컥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빠 때랑 지금이 같아? 요즘에 학원 안 다니는 애들이 어딨어? 문제도 훨씬 어렵다고!”
“뭐라고? 그런 식이면 학원 때려치워! 공부도 못하면서 돈만 축내고. 내가 너 학원비 벌려고 어떻게 고생하는 줄 알아?”
“그만두면 되잖아! 학원 안 다니면 되지, 아빠가 뭘 안다고 그래?”
엄마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잘했다고 큰소리치기는? 네가 인스타 하는 거, 웹툰 보고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거 다 알고 있어. 시험 공부할 때 괜히 자극 줄까 싶어 참아왔는데, 결과가 이게 뭐야? 네가 열심히 안 한 거잖아.”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가슴이 터질 듯 뜨거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 아빠가 미웠다.
내 얘기를 들어준 건 수학 선생님뿐이었다. 눈물이 안경을 덮고, 세상이 번져 보였다.
얼마쯤 달렸을까.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녹색불이 얼마나 남았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어 나는 그대로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옆에서 굉음을 내며 트럭이 스쳐가는 듯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건너편에 도착했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헐떡이며 멈춰 섰다.
'어디로 가지?'
문득, 친구들이 오늘 노래방에 간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무심하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노래가 너무 커서 못 듣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몇 군데 노래방을 기웃거리다, 마침내 유리창 너머로 친구들을 발견했다.
서현이와 예은이는 알록달록한 가발을 쓰고 춤을 추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은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내 마음까지 닿지는 않았다. 한참을 창밖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발길이 이끈 곳은 늘 찾던 만화카페였다. 만화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책장 위의 활자들은 내 눈을 스쳐갔지만 마음은 비어 있었다. 시계가 자정을 넘길 즈음, 집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간 집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혹시 둘이 술이라도 마시러 나갔나?'
침대에 몸을 던지자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달력은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뭐지? 내가 며칠씩이나 잠들어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엄마는 왜 깨우지 않았지?'
부엌 식탁에는 엄마가 앉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엄마, 나도 먹어도 돼?”
그러나 엄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떡볶이만 집어먹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건가.'
나는 대꾸도 듣지 못한 채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아침을 굶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자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내 책상 위에는 흰색 꽃병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예쁜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자리에 앉아 꽃잎에 코를 가까이 대고 은은한 향을 들이마셨다. 바로 그때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옆자리 서현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서현아, 이 꽃 뭐야?”
그러나 서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위로 떨어진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애들이 왜 이래? 다들 이상하잖아.'
그날 반 아이들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묵묵히 수업만 이어갔다. 교실은 숨을 죽인 듯 조용했고, 나 역시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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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흐느낌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용히 방문을 열자, 불빛 가득한 부엌 한가운데, 엄마가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떡볶이를 먹다 만 그릇은 젓가락이 빠진 채 식은 국물을 머금고 있었고, 엄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엄마 맞은편에 앉아 입술을 떨며 말했다.
“엄마, 미안해…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공부할게. 다시는 이런 점수 안 받을 거야. 엄마가 그만 울어야 나도 힘이 나잖아. 나 꼭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들어갈게.”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번쩍 일으켰다. 눈에 광기가 스치듯 번졌다. 아무 대답 없이 베란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엄마, 어디 가?”
엄마는 방충망을 열고 밤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끝은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내디딜 듯 아슬아슬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엄마, 안 돼! 아빠―! 빨리 와 봐, 엄마가 뛰어내리려고 해!”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며 아빠가 뛰쳐나왔다. 그는 몸을 날리듯 달려가, 이미 펜스를 넘어가려던 엄마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붙잡았다.
“여보, 제발 정신 차려! 그런다고 민지가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
아빠는 간신히 엄마를 거실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엄마는 그의 품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놔! 놓으라고! 민지 없이는 살 수 없어. 민지야―! 엄마가 잘못했어, 시험 못 봤다고 그렇게 몰아세운 거, 정말 미안해…!”
엄마는 몸부림치다 결국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로 온몸을 흔들었다.
“민지 시험 보고 온 날, 내가 떡볶이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 우리 민지 좋아하는 쌀떡으로 정성껏 했는데… 그걸 먹이기도 전에 내가 소리만 지르고… 내가 민지를 죽였어. 다 내 탓이야, 다 내 잘못이야…”
아빠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함께 흐느꼈다. 두 사람의 울음은 깊은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통곡 같았다.
'죽었다…? 내가 죽었다고?'
순간, 기억 속에 잊혀 있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물에 젖어 흐릿한 시야, 바뀐 신호를 보지 못한 채 뛰어든 횡단보도, 그리고 굉음을 내며 달려오던 거대한 트럭. 몸이 날아가는 충격과 함께, 모든 게 암흑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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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내가 좋아하던 쌀 떡볶이를 만들었다. 술잔을 곁에 두고, 그 매운 떡볶이를 씹으며 울음을 삼키듯 술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아빠가 그만하라며 달래 보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치 무너져가는 벽을 외면하듯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아빠는 늘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왔고, 엄마와 아빠는 점점 서로의 그림자만 남은 채 말없이 지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두 사람이 다시 예전처럼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주기를.
“엄마, 아빠. 난 괜찮아. 제발 이제는 울지 말고, 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내 목소리는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엄마와 아빠는 듣지 못했다. 나는 마주 보지 않은 채 등을 맞대고 누운 두 사람 사이에 살며시 몸을 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엄마와 아빠의 지난 시간을 보게 되었다.
가난한 집의 다락방, 누런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책을 붙잡고 있던 아빠.
그는 지독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공부뿐이라 믿고, 손끝이 닳도록 펜을 움직였다. 결국 명문대에 합격한 날, 아빠의 눈빛에는 세상을 처음 거머쥔 사람처럼 빛이 스며 있었다. 대기업에 들어가서도 그는 여전히 불안 속에 살았다. 그곳에서 만난 건 엄마였다. 엄마는 아빠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가 능력으로 인정받던 팀장이었다. 당당하고 유능했던 엄마는 아빠와 사랑에 빠져 결국 결혼했다. 그러나 나를 임신하며 엄마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쉬움과 미련이 남았지만, 커다란 배를 어루만지며 태어날 딸에게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던 엄마의 모습은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딸이라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포기한 꿈을 내가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랐다. 나는 늘 엄마의 기대 속에서 자라났다.
시간이 흘러, 회사에서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팀장에서 밀려나 팀원으로 내려앉은 그는 젊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들의 뒷담화 속에서, 그는 ‘나이 들어 버티는 사람’으로 조롱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리에 매달렸다. 어릴 적 가난이 남긴 불안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낳으며 자신의 꿈을 내려놓았구나. 그래서 내가 대신 그 꿈을 이루길 원했던 거야. 아빠는 스스로 이룬 성공이었지만, 늘 불안 속에 살았구나. 그래서 내가 공부를 잘해 안정된 삶을 살길 원했구나.’
그들의 고단한 과거와 사랑, 그리고 희생을 보며, 나는 마음 깊이 이해했다.
어느새 장면은 놀이공원으로 바뀌었다. 여섯 살의 내가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봄바람에 벚꽃비가 흩날리며 하늘을 뒤덮었다. 나는 엄마, 아빠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 나 낳아줘서, 키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나, 엄마 아빠 너무 사랑해요.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제발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엄마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민지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민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그 미소가 너무 좋았다.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워주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빛나 보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아빠의 귀에 속삭였다.
“아빠, 풍선 사 주세요.”
아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풍선 장수에게서 알록달록한 풍선 한 다발을 사 주었다. 내 손에 매달린 풍선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어깨 위에서 더 높이, 더 멀리 세상을 본다는 것이 마치 날개를 단 듯 설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풍선들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빠의 어깨 위에서 점점 몸이 가벼워지더니, 나는 풍선과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바람을 가르며 위로, 위로 오를수록, 땅 위의 엄마와 아빠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나는 가슴이 저려와 눈물이 차올랐다. 떠나는 게 너무나도 슬펐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래에 서 있는 엄마와 아빠는 울지 않았다. 그들은 두 팔을 활짝 흔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가, 우리 민지. 언제나 함께할 거야.’ 그런 마음이 그 미소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꾹 삼키며, 마지막으로 두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어젯밤 꿈에 민지가 나왔어.”
엄마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가가 젖어들었다.
“나도 민지를 봤어요. 민지가 말했어요…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을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순간, 두 사람의 눈물이 하나로 섞였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서로를 꼭 껴안았다.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 울음은 어제와 달랐다. 절망만 남은 통곡이 아니라, 함께 견뎌낼 수 있다는 희망이 섞인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