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마지막 손님

임진각 정모가 끝나고 며칠 뒤, 영실은 퇴근길에 조심스레 지원의 미용실 문을 밀었다.


저녁 9시를 넘긴 시각, 불빛은 따뜻하게 가게 안을 감싸고 있었다. 유리문 위에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라는 듯 고요한 공기가 흘렀다. 지원은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다 영실을 발견하고 반갑게 웃었다.

“어머, 영실 씨! 퇴근하고 바로 오신 거예요?”
“네. 너무 늦게 온 게 아닌가 해서요. 직원분들은 다 퇴근하신 것 같네요.”
“괜찮아요. 오히려 좋아요. 이렇게 늦은 시간엔 손님이 없으니까 편하게 해 드릴 수 있거든요.”

지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하루의 끝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묘하게 포근했다.


영실은 의자에 앉으며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그냥 적당히 다듬어주세요.”
지원은 살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영실 씨, 외모엔 별로 신경 안 쓰시죠?”
“네, 뭐… 그래서 아직도 혼자죠.”
영실이 어색하게 웃자, 지원은 고개를 젓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제대로 만들어드릴게요. 펌도 조금 하고, 염색도 하면 훨씬 젊어질 거예요. 그냥 제 마음이에요.”

그녀의 손끝이 그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 영실은 가슴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온기가 있었다. 거울 속에서 지원의 얼굴이 비쳤다. 조명 아래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지원 씨가 보기 좋은 대로 해주세요.”
그 한마디에 지원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제 기준으로 ‘좋게’ 만들어드릴게요.”

헤어드라이어가 부드럽게 울리고, 젤 냄새와 샴푸 향이 공기 속에 섞였다.


지원은 능숙하게 가위를 움직였다. 가위질 사이로 대화가 오갔다.

“영실 씨는 나이보다 훨씬 차분해 보여요. 근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글쎄요… 어릴 때부터 여자를 잘 안 사귀었어요.”
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연애 안 해본 건 아니죠?”


영실은 잠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아버지와 제 어머니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원은 손을 멈췄다.
“설마… 바람이요?”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더 이상 누굴 믿기가 힘들었어요.”

잠시 미용실 안에 드라이기 소리만 맴돌았다.


지원은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녀는 어느새 그를 ‘손님’이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엄마 없이 지내신 거예요?”
“네. 가끔 연락은 왔지만 만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거든요. 엄마는 제게 늘 증오의 대상이었어요.”

그는 담담히 말했지만, 말끝이 살짝 떨렸다. 지원은 그 떨림이 가슴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키워내셨잖아요. 그건 대단한 일이에요.”
“감사합니다.”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지원의 손끝이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이 그의 귀 옆을 스치자, 영실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의 향기가, 샴푸 냄새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다가왔다.

“영실 씨는 정말 착한 분 같아요.”
지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저는… 그냥 솔직한 사람이 좋더라고요.”


잠시 침묵.
그 사이,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명 아래, 그 시선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흘렀다.
수줍고, 아직 어색하지만, 분명히 서로를 향하고 있는 온기였다.

“지원 씨는… 따님하고 같이 사신다고 했죠?”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중학생이에요. 사춘기라 말도 잘 안 해요. 그래도… 그 애가 있어서 버텼어요.”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저는… 제 어머니가 저를 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요.”


지원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거리의 가로등이 부드럽게 빛났다.
“이혼은… 제가 너무 어릴 때 했어요. 사랑이 뭔지도 모를 때 결혼해서, 그걸 깨닫고 나니 이미 늦었더라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상처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영실은 거울 속의 지원을 바라봤다. 그녀의 뒷모습 너머로, 고요한 불빛이 머리칼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전거를 탈 때 바람이 스치며 귓가를 울릴 때의 그 설렘, 지금 자신이 느끼는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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