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이 바뀌면, 현실이 바뀐다.
요즘은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가족,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이 사회까지 —
누구 하나 뜻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걸 바꾸겠다고 애쓸수록 더 지쳐간다.
바샤르는 반대로 말한다.
“세상을 바꾸지 말고, 나를 바꿔라.”
그 한 문장이, 너무 편하다. 피곤하지 않다.
바샤르는 ‘가슴이 뛰는 일’을 따라가라고 한다. 그게 곧 진동수를 올리는 길이란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건 ‘실천할 수 있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설레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
학생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아이의 눈빛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걸 볼 때, 나는 이미 다른 현실 속에 서 있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하기 싫은 일을 참고 버티는 건 진동을 낮추는 일이다.
좋아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바샤르가 말하는 “평행 현실의 이동”이다.
나는 한때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가족을, 지인을, 사회를.............
모두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내가 바꾸려 할수록, 세상은 더 멀어졌다.
지금은 안다.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반사된 나다.
내가 평온하면, 주변도 서서히 고요해진다.
내가 불안하면, 가족이 흔들린다.
모든 건 진동의 일치다.
바샤르는 부정적인 걸 없애려 하지 말고, ‘정의’(근원 믿음)를 바꾸라고 말한다.
그건 수학의 논리처럼 명확하다. 전제가 틀리면 결론은 항상 어긋난다.
“나는 늘 늦게 성공한다.”
그 믿음 하나가 평생을 지연시킨다.
전제를 바꾸면, 세상은 알아서 따라온다.
“나는 내 시간에 정확히 도착한다.”
그렇게 믿는 순간, 삶의 흐름이 정렬된다.
믿음이 ‘현실을 창조하는 함수’가 된다.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진동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다시 배열된다.
지금의 나를 바꾸면 그에 맞는 과거와 미래가 새로 짜인다.
그러니 전생이나 운명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바꿔야 할 건 언제나 현재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내가 다른 현실로 이동할 뿐이다.
바샤르의 세계관은 결국 **‘행동의 철학’**이다.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가슴 뛰는 일을 하라.
글을 쓰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혹은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가르는 일.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바꾼다.
나는 이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다만 내가 진동하는 세상을, 선택할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지금, 너는 어떤 진동으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