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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하여

자신이 신임을 깨닫게 만드는 도구

사람들은 명상을 ‘마음을 비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절반만 맞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단지 생각을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명상은 ‘생각 이전의 나’를 기억하는 일이다.


생각이란 늘 소음을 낸다. 오늘의 일, 어제의 후회, 내일의 불안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붙잡으려 애쓴다. 하지만 명상은 그 모든 붙잡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의자에 앉아 호흡을 바라보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씩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이 나를 쉬고 있다는 것을.


명상을 시작한 사람에게 명상은 도구다.
자기 안의 혼란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한 장치.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처음으로 ‘나 없음’의 경험을 한다.
생각이 잠시 사라지고, 감정이 고요히 가라앉으며, 분리된 세상이 희미하게 녹아든다.

그때 사람은 문득 깨닫는다.
세상은 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품고 함께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한편, 깨달은 사람에게 명상은 다르다. 그는 이미 문을 통과했다.
명상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명상은 ‘돌아가는 일상’이다.

숨을 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걸을 때도,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부딪히는 순간, 감정이 일렁이는 순간에 오히려 더 깊은 명상이 일어난다.
그때 그는 안다.
명상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아 있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 명상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 포옹이 필요한 이유와 같다.
깨달음은 번개처럼 찾아오지만, 명상은 그 빛을 잔잔하게 지켜주는 등불이다.


명상을 오래 하면 세상이 단순해진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옳음과 그름,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세상이 단순해졌다는 말은, 세상이 가벼워졌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생각이 멈춘 자리에 고요가 있고, 고요 속에서 나는 다시 세상을 본다.


명상은 깨달음을 얻는 길이기도 하고, 그 깨달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명상을 게속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지만, 어쩌면 이 세상이 나를 쉬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면, 모든 게 잠잠해진다. 생각이 멈추고, 나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그 순간엔 오직 세상만 존재한다.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고, 아무것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
그게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멀리 있는 비법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 그 자체로 사는 일이다.


명상은 깨닫기 위한 도구이자, 깨달음을 살아내는 호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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