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본질
수포자였던 한 엄마가 있었다. 자녀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교과서를 펼쳤다.
처음엔 숫자만 봐도 머리가 아팠고, 문제를 풀다 보면 금세 짜증이 올라왔다.
“역시 수학은 나랑 안 맞아.”
그렇게 포기하려던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 이거 왜 이렇게 풀어요?”
대답을 해줘야 했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엔 조금 달랐다. 예전처럼 답을 맞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스스로 납득하고 싶어서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수학이 조금 ‘재밌다’는 감각이 스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엄마는 아이보다 먼저 수학 책을 읽고, 혼자 공책에 공식을 써보고, 심지어 SNS에서 수학 공부 기록을 나누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작은 모임도 만들었다.
그녀의 삶은 어느새, ‘수학이 싫은 사람’에서 ‘수학을 즐기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아마 결핍으로 공부하던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의 공부는 대부분 ‘해야 하니까’였다. 점수와 경쟁, 비교와 불안이 뒤섞인 결핍의 에너지 속에서 공부는 늘 나를 평가하는 잣대였다. 공부는 나를 성장시키기보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행위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공부할 때, 그 동기는 전혀 다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알고 싶어서, 즐기고 싶어서 시작한다.
그건 결핍이 아니라 충만의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이때 공부는 더 이상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는 놀이’가 된다.
정답보다 과정이 중요해지고, 비교보다 이해의 기쁨이 커진다.
그 안에서 사람은 비로소 ‘공부의 본질’을 느낀다 —
배우는 행위 자체가 삶의 리듬과 닮아 있다는 걸.
공부는 원래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무’로 여기는 순간부터 재미는 사라지고, 우리가 그것을 ‘자유’로 느끼는 순간부터 다시 살아난다. 그 엄마가 다시 수학을 좋아하게 된 건, 수학이 변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변한 것이다.
결핍으로 달리던 시절이 지나고, 충만으로 배우는 시절이 온 것이다.
배움은 결국 ‘삶을 사랑하는 다른 방식’이다.
그녀가 수학을 통해 깨달은 것도 어쩌면 그 한 문장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