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종교·영성·철학을 지나 도착한 하나의 구조
오랫동안 나는 이 세상을 설명하는 여러 관점을 들여다봤다.
기독교의 창조 서사, 불교의 연기와 공, 스피노자의 일원론 철학, 그리고 영성계에서 말하는 진동·의식·평행현실 같은 개념들.
각각의 메시지는 독특하지만, 삶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관통하기엔 어딘가 빈틈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경험을 기준으로 이 모든 것을 다시 배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정리된 것이 내가 선택한 우주관이다.
나는 이 문장을 신념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해했다.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도 상상했던 장면들이 형태는 달라도 결국 현실이 되어왔다.
칭찬받는 아이가 되기를 상상했고
명문대에서 공부하는 나를 그렸고
강사가 되는 미래를 자주 떠올렸고
강연, 집, 자동차, 책 출간 같은 장면들을 그렸다
이런 상상들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실제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힘이었다.
그 경험은 하나의 결론을 남겼다.
현실이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패턴이 현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이것은 종교적 메시지를 넘어서 내 삶을 설명하는 더 논리적인 구조였다.
나는 미래를 단일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형태로 이해한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는 결과보다 지금의 나의 상태와 더 깊게 연결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예정·선택, 불교의 업과 연기, 양자역학의 확률적 세계관, 바샤르가 말하는 평행현실—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내 의식이 닿는 쪽으로 가지가 연결된다.
이 관점은 삶을 좁게 만들지 않고 더 넓고 유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진동이라는 단어는 영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보다 구체적인 개념으로 쓴다.
어떤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가
어떤 생각의 패턴이 반복되는가
선택은 어떤 톤으로 이루어지는가
이것이 결국 내가 선택하는 현실의 결을 만든다.
가난했던 시절 나는 이미 ‘그 이후의 나’의 감정을 앞서 경험했다.
어렵고 결핍된 현실에서도 내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 감정의 차이가 내 삶의 현실을 한 단계씩 움직여온 것이다.
나는 상상을 단순한 꿈이나 바람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상상은 내가 ‘향하고 싶은 방향’을 미세하게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샤워할 때, 산책할 때, 잠들기 전— 나는 자연스럽게 미래의 장면을 떠올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장면 속의 감정을 먼저 떠올렸다.
결핍을 채우려는 상상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내가 느끼는 정서를 발견하는 방식이었다.
상상은 현실을 끌어오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과 나를 정렬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이해하니 상상은 현실을 곧게 세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여기서 나는 종교와 영성을 관통하는 공통 지점을 보았다.
기독교는 신을 창조자로 말하고 불교는 분리된 자아가 없다고 말하며 영성은 모든 의식이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각자의 언어는 다르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로 이렇게 정리했다.
신은 외부의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의식의 원본 구조이며 우리는 그 일부로서 세계를 체험한다.
이 관점은 삶을 미신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주체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내가 느낀 가장 현실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흐름 중 하나를 선택해 살아가는 존재다.
현실을 만드는 힘의 본질은 ‘창조’가 아니라 어떤 세계와 정렬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어떤 종교보다 신성하고 어떤 교리보다 인간적이다.
나는 오랫동안 결핍의 우주에서 살았다. 불안과 조급함,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어떤 성취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삶의 구조를 하나씩 바꾸며 충만 기반의 세계에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억지 긍정이 필요 없었다. 단지 삶이 정렬되고 선택이 단순하고 흐름이 부드러웠다.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결의 우주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정리했다는 것은 이 우주관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고 내 경험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준다는 뜻이다.
선택했다는 것은 이 우주관이 나의 삶을 가장 충만하게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를 신앙하듯 이 우주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깊고 명확하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불안을 낮추고 삶의 중심을 되찾고 내면의 질서를 세우고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