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의 효도가 마음 아픈 이유

오늘 둘째 딸이 학원에 늦게 왔다. 아마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러 간 것 같다. 둘째는 세 아이 중에서도 유독 이런 걸 잘 챙긴다. 외할머니 생신, 부모 생일, 기념일 같은 것들을 꼭 기억하고 준비한다. 보통은 이런 아이를 두고 “효녀”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잘 안 붙는다. 고맙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행이나 배려, 효도는 그 출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충만해서 하는 행동은 하고 나서도 남는다. 기쁨이 있고, 가벼움이 있다. 반대로 인정받고 싶어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겉으로는 착해 보여도 안쪽에서는 계속 공허를 만든다.

“나는 손해 보고 있다”는 감각을 쌓고, 그 감각은 또 다른 결핍을 낳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선균 캐릭터가 그렇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효도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자기 삶은 없다. 항상 참고, 버티고, 감당한다. 시청자가 그를 존경하기보다 아프게 느끼는 이유다.

반대로 그의 형제들은 다르다. 눈치 보지 않고, 피해의식이 없고, 자기 삶을 산다. 부모에게 효도는 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건강해 보인다. 극 중 고두심의 대사가 그걸 정확히 말해준다.

“내가 죽고 나서 제일 걱정되는 건 제일 잘된 둘째다.”


부모는 안다. 가장 효도하는 자식의 속이 가장 썩어 들어간다는 걸.

이걸 떠올리게 된 이유는 내 세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였다.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온전히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셋째는 태어나면서부터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가 사실상 전담으로 키웠다.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했고, 막내이자 아들이라는 위치에서 사랑을 거의 독점했다.


극단적인 예로, 첫째는 네 살 때부터 놀이공원에 가면 혼자 걸어야 했지만 셋째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도
할머니 등에 업혀 다녔다. 잘 때는 할머니가 등을 긁어주며 재웠고, 방도 오래 함께 썼다. 그에 비해 둘째는 항상 그 사이에 있었다. 힘센 언니와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막내 사이에서 자기도 모르게 피해의식을 키웠다.

“나는 손해 본다.”
“나는 사랑이 부족하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쁨을 받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게 공부 열심히 하기, 착한 태도, 효도로 나타났다.


세 아이는 정말 다르다. 첫째와 나는 헬스장을 함께 다닌다.

둘째도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 “같이 다닐래?”라고 물었더니 둘째는 이렇게 되묻는다.

“우리 돈 있어?”

첫째와 셋째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냥 “좋아”라고 한다. 받아도 되는지 의심하지 않는다. 특히 셋째는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분명하다. 그걸 당당하게 말한다. 요구도 정확하다. 첫째도 셋째만큼은 아니지만 눈치를 많이 보지 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반면 둘째는 항상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지, 내가 이만큼 누려도 되는지 스스로를 검열한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애착 관계에 따라 결핍의 결은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둘째의 효도가 고맙기보다 아프다. 그 행동이 충만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인정욕구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아이가 착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걸
몸으로 알았으면 좋겠다.


효도를 덜 해도 되고, 착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지 않아도 관계가 깨지지 않는 경험.

그걸 부모가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


효도는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대가로 한 효도는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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