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대한 질문을 좋아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세계는 창조되었는가, 우연인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이 질문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들은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이 질문의 답을 알면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대략 세상에 대한 설명은 네 가지로 나뉜다.
전능한 신이 의도를 가지고 창조했다.
신은 있지만 그 의도는 인간이 알 수 없다.
이 세계는 고차원 존재가 설계한 시뮬레이션이다.
아무 의도 없이 물리 법칙 속에서 우연히 발생했다.
이 네 가지는 철학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내일 아침의 당신의 행동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령 이런 상황을 보자.
당신이 학원을 운영한다. 학생 수가 줄고 있다.
신이 창조한 세계라면 → 이 시련은 시험일까?
시뮬레이션이라면 → 난이도 상승 구간일까?
우연이라면 → 단순한 시장 변화일까?
설명은 다르다. 하지만 남는 질문은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권리금을 포기하고 정리할 것인가, 버틸 것인가, 구조를 바꿀 것인가.
신의 존재 여부는 당신의 선택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신이 존재하든, 우주가 우연이든, 우리는 여전히
수입이 줄어들면 불안해하고
관계가 틀어지면 괴롭고
과도한 책임에 지친다.
이 반응은 세계관과 무관하다. 이건 생물학적이다. 신을 믿는 사람도 번아웃이 오고, 무신론자도 번아웃이 온다. 이건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의 문제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덜 마모되며 살 것인가?”
이 질문이 훨씬 정직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원을 모른 채로 이미 삶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신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삶이 달라질 것이다.”
정말 그럴까?
신이 존재한다고 확정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다음 질문은 즉시 등장한다.
그 신은 선한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시험인가, 관찰인가, 놀이인가?
존재를 아는 것과 의도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다. 신의 존재가 증명되어도 의도는 여전히 해석의 영역에 남는다. 결국 우리는 다시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온다.
이 세계가 거대한 게임이라면?
그렇다면 성공을 극대화하는 공략집이 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감정에 흔들리고
피로를 느끼고
관계에서 상처받는다.
게임이라는 사실이 고통을 제거해주지는 않는다. 게임 속에서도 에너지는 관리해야 한다.
아무 의도 없이 물리 법칙 속에서 발생한 세계라면?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직접적이다. 누구도 설계해주지 않았으니 내 삶의 구조는 내가 설계해야 한다.
어떤 가설을 채택하든 사라지지 않는 네 가지가 있다.
우리는 전체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한다.
경험은 피할 수 없다.
신경계는 쾌·불쾌에 따라 움직인다.
이 네 가지는 신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신의 증명보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돈에 덜 묶이는 구조.
많은 책임을 지는 것보다 내가 선택한 책임만 지는 삶.
성공하는 것보다 마모되지 않는 운영.
근원에 대한 질문은 고귀하다. 그러나 종종 현실 회피의 도구가 된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를 묻는 동안 우리는 정작 오늘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신의 의도를 찾는 동안 우리는 번아웃을 방치한다.
시뮬레이션 여부를 토론하면서 우리는 관계의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신이 있든 없든 시뮬레이션이든 우연이든
당신은 여전히
에너지를 관리해야 하고
책임의 범위를 정해야 하고
마모되는 구조를 수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이 세계 안에서 어떤 운영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젊을 때는 근원을 찾는다. 중년이 되면 운영을 고민한다.
근원을 모른 채로도 삶은 이미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더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지금 이 삶을 덜 마모되게, 더 자율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고 있는가?
그 답은 우주의 비밀이 아니라 당신의 하루 구조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