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돌이켜봤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기에.
"아들아, 너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나는 너의 나이 때 이런 것들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것들은 꿈에 꾸지도 못했으며,
그 나이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시지도 않았다.
나는 너와 지금 함께 대화하고
온갖 좋은 것들과 원하는 것들을 모두 사줬고
사랑으로 너를 키웠다.
그리고 열심히 노후를 준비한 덕분에
자식인 너에게 미래에 짐이 될 일도 없다.
이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을 감사히 여기며
타인을 도울 때 열정적으로 도와줘라.
정말로 명심해라."
나는 내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것들은 만들어봤으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경험을 쌓았다.
기업 대표부터 국회의장에 이르기까지 젊은 나이에는 보기 힘든 사람들을 만나봤으니까.
세상을 흘러가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요즘 그렇게 뜨겁다는 컴퓨터도 전공했다.
덕분에 주변에서는 대단하다는 소리를 꽤나 들었으며,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도 많이 보고 만들었다.
20대 초반부터 방학 때는 국내를 떠나 해외여행을 즐겼으며,
학기가 시작되면 수많은 동아리 활동과 연애를 즐겼다.
부모님 덕분에 얼굴과 신체가 건강하게 태어났으며,
한 번도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해본 적이 없고, 가지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살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굶어보지 않았으며,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나름 부자 나라인 이 땅에 태어나서 비싸고 넓은 집에서 자랐다.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좋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나를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많고, 동생들과 누나 형들이 많다.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새해가 밝아온다.
갑자기 왜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졌다.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해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마음속 깊이 새기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이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를.
이제는 진실된 모습의 나와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진실한 모습을.
직업에 귀천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확실한 것은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인생을 살아왔을 거야"라고
지레짐작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을 포기하고, 그/그녀가 하는 일로 사람을 판단했다.
직업은 직업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존경심으로,
그렇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멸시로 변해가지 않을까.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도록 내가 바꾸고 싶다.
그렇게 바꾸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솔직해지자.
일평생 경쟁을 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그런 적은 없다.
학창 시절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무시하기 일쑤였고,
부모님조차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다니라고 권유한다.
더 나은 환경에 있는 친구와 친해지고 싶고,
가난하거나 몸이 불편한 친구는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경우는 허다하다.
다 커서는 어떤가?
쓸 데 없는 것들로 사람을 비교하고, 재단하며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학벌, 재산, 외모,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연인 수준까지 판단한다.
나는 정말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다.
'왜 내가 저 사람보다 잘났는데 나는 안됐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분명히 내가 더 능력이 있는데,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사회의 탓이다.
나는 잘못이 없지만 저 사람이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하다.
이 사회는 이렇게나 불공정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충분히 성실하지 못했다.
나는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때로는 게으른 나에게 굴복하며 합리화했다.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과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가치는 끊임없이 절하했다.
나는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면서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정말 언젠가는 창업할 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제품을 꼭 만들어볼 거야."
"나는 성장이 중요해. 작은 기업이라도 들어가서 고생해봐야지."
누군가 그랬다. 머리에 든 게 많으면 더 멍청해진다고.
나는 주변에 온갖 것들을 말하고 다녔다.
나만큼은 주변과 다르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공채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운 좋게도 큰 은행들과 기업들의 최종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
나는 자만했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 떨어지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합격했어도 문제였겠구나.'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동시에 내 주변을 되돌아보게 됐다.
손에 꼽는 회사에 들어갔지만 항상 퇴사하고 싶다는 친구와
작은 회사에 들어갔지만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친구.
전자는 매일 커피를 마시며 상사와 회사를 욕하고,
후자는 항상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나를 되돌아봤다.
나는 왜 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왔을까.
나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몰랐을까.
나는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예쁘냐?"
남자들이 소개팅을 받을 때면 항상 한다는 말이다.
가끔은 개그 소재로도 이용되고, 슬픈 현실이라는 의견도 있다.
외모는 권력이다.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예쁘고 잘생기게 태어난 것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서 부를 가져다준다.
부 뿐인가? 살아가면서 그들이 얻는 혜택은 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어떤 연구에서는 더 좋은 외모를 가지고 있을수록 더 적은 형량을 선고받는다는 결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모두를 감안하고서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해왔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어도 속으로는 더 나은 외모의 사람이 낫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의 외모를 의식하며 살아왔다.
가끔은 그것이 내게로 돌아왔다.
"속쌍꺼풀 수술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코 앞 몽우리를 조금 줄이고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외모의 수준을 판단하고,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외모로 타인을 재단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능력 있는 사람,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사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사람,
비전을 보고 더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
서서히 깨닫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표지가 아니라 책 속의 내용이라는 것을.
몇 년 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빠는 똑똑하고 잘생겼고 자기관리까지 하고,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문제인 것 같아."
"뭔데?"
"말을 너무 함부로 해. 그것만 고치면 정말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을 텐데."
첫 문장이 조금 자랑하는 듯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자랑이 아니다.
친한 동생은 나를 불러놓고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연습을 하는 게 좋겠다"라고.
나는 솔직한 성격이라는 것을 핑계로 타인에게 함부로 말했다.
함께 일하면서도 능률이 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고,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다고 치부하기도 했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무시했으며,
그것도 모르면 되겠냐고 함부로 이야기했다.
친하다는 이유로 욕설과 함께 심한 장난을 쳤으며,
가끔은 그 사람의 단점을 은근히 밝혀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에게 반대로 칭찬해주지 못했으며,
내가 받는 사랑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느꼈다.
다시 생각했다.
이 세상에 배려받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나도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부제인 이 문장은
어딜 가나 나보다 낫고 훌륭한 사람은 있다는 뜻이다.
예전의 나는 그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 될 사람이 있으니, 그중 좋은 점은 골라서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은 거울삼아 고치도록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보다 부족한 것이 느껴지면 그것을 반면교사 삼아 성장하고,
나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함께 나아지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분명히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가톨릭(천주교)에는 고해성사(고백성사)라는 개념이 있다.
신부(사제)에게 자신이 잘못한 것을 고백하면 신부(사제)는 신의 이름으로 그것을 용서하고 보석으로 어떤 기도를 하라고 이야기해준다.
나는 아직 젊다. 너무나도 행운스럽게도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젊은 날에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며 후회한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나 자신도 나를 알지 못했다.
부모님도, 타인도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생각해보면 나의 빈틈을 발견한다.
'나를 객관화하기.'
그것을 통해 나는 얼마나 치졸하고 부끄럽게 살아왔는 지를 알게 됐다.
어려운 시대에는 시인들은 시를 쓰며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듯이
나도 이 글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내가 지금 겪은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지워가며 발전하는 것.
나는 여러 면으로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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