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05 강박증, 강박, 규칙, 정신과, 숫자 세기, 배열, 대칭
목요일 오후 외래 시작 30분 전. 나는 의자에 앉아 내 책상을 보았다. 그리 지저분한 건 아니지만 깨끗이 정돈되어 있지도 않은 내 책상. 해골, 스테이플러, 키보드, 마우스, 액자, 시계, 머그컵... 어느 하나도 나름의 규칙을 갖고 놓여 있는 것은 없다. 정돈되어 있지 않은 물건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이게 불편할까?’ 하는 거였다. 예전에 다른 강박증 환자분이 자신의 정돈된 책상을 사진 찍어와서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 책상은 적잖이 불편한 책상이다.
민혁 씨는 진료실에 들어오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서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고 있다. 민혁 씨는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전개처럼 보이지만 부자연스럽다. 그는 아직도 하나, 둘, 셋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Dr: “지난 일주일 간 잘 지내셨어요? 투약하고 불편한 건 없었나요?”
민혁: “... 네. 약은 정해진 때에 맞게 복용했습니다. 부작용은 딱히 없었어요.”
Dr: “그럼 불안, 긴장 증세가 좋아지는 것은 있었나요?”
민혁: “... 마음이 좀 편안한 것은 있었어요. 약을 먹으면 뭔가 치료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 외에는 다른 변화는 모르겠어요. 선생님.”
Dr: “네. 우선 처방한 약물은 치료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략 2주 정도는 꾸준히 복용하실 필요가 있어요. 결국 약물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혈중 약물 농도인데 같은 용량의 약물을 복용해도 혈중 약물 농도는 투약 기간에 따라 항정 상태에 이를 때까지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그때그때 약물 용량을 올리기보다는 충분 기간 복용해서 항정 상태에 혈중 약물 농도를 도달시킨 후에 효과 판정을 합니다. 약 드시고 딱히 불편한 것이 없다면 동일 용량으로 더 복용해보도록 할게요.”
민혁: “... 네. 선생님.”
Dr: “그래요. 약물 농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치료 농도에 도달할 테니 그건 그대로 두고요. 우리가 할 일을 하죠?”
민혁: “... 그게 뭔데요? 선생님.”
Dr: “그건 강박행동의 원인을 찾아내서 평가하고 치료하는 거죠. 민혁 씨가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 상태를 유발하는 건 그 상황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라는 거죠. 책상이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혁 씨는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불안, 초조라는 감정으로 고통받고 결국에는 책상을 정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가 하는 거죠. 정돈되지 않은 책상을 두고 나올 때 불안을 유발하도록 하는 생각은 뭐죠?”
민혁: “...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불안한 것 같진 않아요. 선생님. 그냥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그래요. 치료하는 데에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생각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걸 모르면 치료가 안 되나요?”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민혁 씨가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기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치료되고 싶은 민혁 씨의 마음이 느껴졌다.
Dr: “우선 적절한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군입소 후 훈련소에서 모포를 각을 재어가며 개어놓잖아요. 훈련 나갔을 때 모포를 잘 개어놓지 않았으면 훈련받는 동안 불안하고요. 그런데 군대에서는 그렇게 안 하면 상관한테 혼이 나거나 기합을 받잖아요? 실질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정돈하지 않으면 기합 받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한다고 그를 강박증으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까요?"
민혁: "그건 아니겠죠. 저도 훈련소에서 모포는 정말 각을 딱 맞춰서 개어놨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모포를 잘 개어놓으면 조교한테 칭찬도 받고 기합 받는 걸 피할 수 있으니까요."
Dr: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혁 씨의 정리정돈은 실질적인 이득이 있는 행동인가요? 또는 정리정돈을 안 하면 실질적인 피해가 있어서 하는 건가요? 예를 들어서 책상 정리 안 하면 상관한테 혼날까 봐 정리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하나, 둘, 셋 하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걸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거나 자신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있었나요?"
민혁: “... 그건 아니죠. 상사가 오히려 책상 정리하는 저를 보며 한숨만 쉬고 일은 언제 하냐고 뭐라고 하니까요. 아내도 제가 숫자 세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때문에 답답하다고 난리고요. 선생님. 그저 죽지 못해 하는 거예요. 안 하면 너무 불안하니까요.”
Dr: "그러니까요. 그렇다면 실질적인 이득이 전혀 없고 오히려 그런 행동 때문에 직업적인 활동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데도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을 유발하는 그 생각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거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죠. 그만큼 불안을 유발하는 생각을 밝히는 과정은 중요한 치료단계입니다."
민혁 씨는 물건이 정돈되지 않은 책상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민혁 씨에게 정돈되지 않은 책상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민혁 씨에게 잘 정돈된 책상은 그저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화를 면하고 흉한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줄 것만 같은 그런 부적.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과관계지만 그저 자기 위안은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부적. 민혁 씨에게 잘 정돈된 책상과 마음속으로 셋까지 세고 행동하는 것은 그저 미신적인 부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민혁 씨는 미신 같은 부적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자신도 비논리적인 인과관계임을 알면서도 내적인 불안을 해결할 길이 없어 부적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치료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민혁 씨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