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OK?’
‘Are You OK?’의 줄임말로 ‘너 괜찮니?’라는 뜻이다. 지난 2009년 호주에서 시작된 자살 예방 캠페인이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안부나 상태를 물음으로써 관계망을 강화시켜 자살을 예방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1997년 뉴질랜드에서 시작된 ‘내 마음이 네 마음(Like Minds, Like Mine)’ 캠페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부터 ‘괜찮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너 괜찮니?’는 ‘너에게 관심이 있다’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의미다. ‘토닥토닥’ 온기를 불어넣는 표현이며,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살은 관계 단절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 절망, 무망(無望),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느끼는 감정의 극단적인 결과다.
사람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연결돼 있을 수밖에 없다. 독립된 개체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연결을 갈망하고 연결망 속에서 안전과 행복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커넥티쿠스’(homo connecticus), 즉 ‘연결하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계적 삶’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기술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한없이 확장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구 어느 곳 누구와도, 원하는 때에, 간편하게’ 연결할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건 이런 관계의 확장성이 깊이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소통이 안 된다고 난리다. 관심을 받지 못해 슬프다는 사람이 넘쳐난다.
‘깔창 생리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큰 죄악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데 말이다. 버나드 쇼도 무관심이야말로 비인간적인 감정이라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200년 전 독일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1776~1822)이 쓴 《호두까기 인형》은 관심과 따뜻한 시선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동화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흐르는 발레 공연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이다.
주인공 ‘마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부(代父)인 드로셀마이어 아저씨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는다. 호두까기 인형은 머리가 크고 눈도 튀어나온 못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리는 왠지 인형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날 밤 호두까기 인형을 데리고 장난감 방에 있던 마리에게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생쥐 떼가 나타나 장난감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장난감들의 지휘자가 된 호두까기 인형은 생쥐 왕에게 심한 공격을 받는다.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을 구하려다 쓰러지고 만다.
다음 날 엄마에게 발견돼 침실로 옮겨진 마리는 전날 밤에 겪은 일을 가족에게 설명한다. 하지만 아무도 마리가 겪은 일을 믿지 않는다. 드로셀마이어 아저씨만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저씨는 마리에게 잘생긴 청년이 생쥐 왕의 원한을 사 흉한 얼굴의 호두까기 인형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을 들려준다.
며칠 뒤 생쥐 왕은 아픈 마리를 찾아와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면 호두까기 인형을 괴롭히겠다고 협박한다.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을 생쥐 왕에게 내어준다. 결국 마리의 사랑을 받은 호두까기 인형은 용기를 내어 생쥐 왕을 무찌르고 마리에게 멋진 인형 나라를 구경시켜 준다.
환상적인 여행을 추억으로 남기고 현실로 돌아온 마리 앞에 어느 날 늠름한 청년이 나타난다. 그 청년은 마리의 진실한 사랑 덕에 생쥐 왕의 저주에서 풀려난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청년은 마리에게 청혼을 하고, 마리는 청년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간다.
《호두까기 인형》은 인형을 아끼는 마리의 따뜻한 마음과 호두까기 인형이 보여준 용기가 더해져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건 관심과 공감과 이해와 존중이 희미해져 가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 때문 아닐까.
의사소통이라 번역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는 ‘역할을 함께 분담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과 같은 맥락이다. ‘맞든다’는 건 소통이고 협력이며 공존을 위한 행위다. 생존을 위해 ‘관계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의사소통은 결국 공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까 공존이라는 목적 없이 이루어지는 말이나 행동의 교환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 통보이거나 강요, 혹은 협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나’를 살면서 동시에 ‘우리’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개인인 ‘나’도 잘 살아야 하지만 ‘나의 확장’인 ‘우리’도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갑’과 ‘을’로 나눠진다. 대체적으로 갑은 시혜자, 을은 수혜자다. 갑이 을에게 진심 어린 관심이 있을 때 더불어 잘 살 수 있다. 관심은 ‘도우려는 상대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무엇을 주려거든 그의 필요와 취향을 먼저 파악해 둘 일이다. 그러니 직접 부대끼고 소통해야 한다.
인간을 컴퓨터에 비교해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생긴 본능대로 생각 없이 사는 ‘롬(ROM) 형 인간’, 배워서 회사 주는 ‘램(RAM) 형 인간’, 클라우드 컴퓨터 특성처럼 자신보다는 구름 속 그 무엇에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클라우드(Cloud) 형 인간’, 남에게 시시콜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센서(Sensor) 형 인간’이 그것이다. 이 불통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센서형 인간’이다. 적어도 소통과 공존을 위해서는.
그러니 누군가의 책상 위해 꽃 한 송이 놓아 둘 일이다. 꽃 한 송이를 놓는 일, 배타적인 성(城)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무너진 성벽을 넘어 밖으로 나설 때 타인과의 관계와 성장이 시작된다.
호모 커넥티쿠스들이여! 이제 이렇게 안부를 물을 일이다.
“너 괜찮니?”
“어르신 괜찮으세요?”
이때 비로소 소통의 톱니바퀴가 작동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