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며 몇 달 동안이나 이혼을 요구한 50대 초반의 여인이 있었다. 그날도 이야기 끝에 이혼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아내의 이혼 요구에 남편은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법원. 차에서 내린 아내는 건물로 들어가려는 남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파 죽는다고 무릎을 만지는 남편에게 그녀가 말했다.
“이 양반아! 내 마음 정말로 몰라 정말 이혼하려고 여기로 왔어 내가 미쳐, 정말 미쳐!”
아내의 친구 이야기다. 역시 사람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단연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순간에도 수십 가지 떠오르는 그 바람 같은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사실 기적 같은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1900~1944)는 유명한 보아뱀 그림으로 시작되는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를 통해 그 ‘기적’을 이야기한다. ‘길들이기’를 통해서다. 길들여지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B-612로 불리는 소행성.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다니던 중 지구로 온 어린 왕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우를 만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며 꼭 필요한 존재로 관계가 발전한다. 어린 왕자는 지구에 온 지 1년이 되는 날 떠나온 별로 다시 돌아간다. 이상은 대강의 소설 줄거리다. 아래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
“이리 와서 나랑 놀자.”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나는 너랑 놀 수 없어.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길들인다’는 건.” 어린 왕자가 물었다.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그때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야. 내게는 너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네게는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여우가 되는 거야. 사람이란 자신이 길들인 것밖에 모르는 법이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너는 영원히 책임지게 되는 거야.”
소설은 상대의 마음 얻기가 길들여짐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길들여진다는 건 둘의 마음이 서로 스며들고 젖어든다는 의미다. 상대의 마음을 나로 물들이고, 나의 마음을 그로 물들이는 것이다.
서로 물들이고 물들면, 그건 통하는 것이다. 一心, 즉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오직 진심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오래전 ‘내 안에 너 있다’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아닐까.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을 때 ‘우리’가 될 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될까. 내가 너를 얻는 걸까, 아니면 내가 나를 버리는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노래 가사 하나가 그 답을 알려주는 듯하다.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네.’
노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의 일부다. 충청도에 사는 이현주 목사의 시에 노래꾼 장사익이 노래를 입힌 곡이다.
강이 말한다. 남한강이 남을 버리고 북한강이 북을 버릴 때 둘은 마침내 한강이 된다고. 작은 것을 버려야 큰 것이 되고, 나를 버려야 우리가 된다고. 큰 것은 얻음이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노래는 만남을 통해 채우고 얻고 강해지고 부유해지려는 우리네 얄팍한 심사에 일침을 가한다.
버려야 얻게 되는 이치. 그게 어디 강물에만 해당될까. ‘우리의 울타리’로 들어가려면 먼저 ‘나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도 나의 울타리를 넘어설 때 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의 첫 관문은 꽁꽁 닫힌 ‘내 마음의 빗장’을 여는 일이다. 소통은 빗장이 열릴 때 비로소 시작된다.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듯 자연스러운 스밈과 은근한 젖음, 거부할 수 없는 번짐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