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의 남자가 수확한 벼의 낟알을 세고 있다. 기존 벼와 새 품종의 수확량을 비교해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다. 말단 공무원인 그의 낟알 세기 작업은 밤이 새도록 계속됐다. 작업시간이 길었던 건 다른 공무원들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 다른 사람들은 벼 한두 포기만 뽑아 수확량을 비교했지만 그는 품종 서너 개를 각각 50포기씩 비교했다. 정확한 비교를 위한 자발적 노동이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공무원 버전이랄까.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고 했다. 우직한 그가 옮긴 건, 아니 움직인 건 자식들의 마음이었다. 6남매 자식들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자식들의 마음에는 ‘최선’과 ‘정직’, 두 단어가 새겨졌다. 6남매 중 4형제가 행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남매의 자식들도 부모의 행동을 보며 올곧게 성장하고 있다.
신문에 난 어느 대학 교수와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서른의 나이에 공무원이 된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이다. 스토리가 아름다워 신문을 스크랩해 놓았더랬다. 궁금했다. 아버지가 자식들의 마음을 움직인 동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다움’이었다. 아버지다움!
아버지가 아버지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니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고 닮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 맞은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은 것이다. ‘~다움’의 힘, ‘~답게’의 힘이었다. 요즘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과 사고는 ‘다움’과 ‘답게’가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
‘다움’과 ‘답게’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아버지답게는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고, 어머니답게는 어머니 자리를, 자식답게는 자식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선생님답게, 학생답게, 스승답게, 제자답게도 마찬가지다.
‘다움’과 ‘답게’의 적용 범위는? 무한대다.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 형답게, 동생답게, 친구답게, 사장답게, 직원답게, 공무원답게, 정치인답게, 대통령답게, 시민답게, 방송인답게, 의사답게, 교수답게, 공인답게, 기자답게, 언론인답게, 종교인답게…. 대충 생각나는 대로 붙였지만 그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건 선(善)이고 조화(調和)이며 아름다움이다. 책임감이고 절제이며 행복이다. 지혜이고 성숙이며 사랑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고 걱정이 생긴다.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는 건 필연이다. 열차를 벗어난 바퀴, 건물을 벗어난 기둥, 몸에서 빠져나온 심장, 궤도를 벗어난 지구는 생각하기도 싫은 재앙 아닌가.
그렇다. 자리를 지킨다는 건 본질에 충실한 것이고 역할을 다한다는 의미다. 비본질을 곁눈질하거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고통을 겪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선생이 제 역할을 못하면 제자가 망가지고,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하면 아내와 자식이 힘들어진다.
마찬가지로 리더가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하면 추종자들은 오합지졸이 되고, 의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환자가 심각한 곤란에 빠진다. 공직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언론인들과 종교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에 기강이 서지 않는다.
‘다움’과 ‘답게’는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다. 거기에는 인내와 절제, 겸손과 올곧음, 희생, 숨은 선행,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 같은 덕목들의 향기가 묻어난다.
그 향기가 흠뻑 배어있는 게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다. 이 시대의 목민관들이 읽어야 할 바이블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해 38세에 형조참의의 벼슬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조선후기 실학자다. 10년간의 공직 기간 중 다산은 ‘공렴(公廉)’이라는 두 글자를 철저히 이행했다. 공렴은 공정과 공평, 청렴한 행정이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갔던 다산은 귀양지에서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신음하는 백성을 보며 《목민심서》를 지었다.
목민심서는 고을의 수령인 ‘목민관’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목민관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자기만족이나 명예, 출세를 탐해서는 안 되며 오직 백성을 위해야 한다는 것. 정약용은 목민관이 청렴하지 않으면 도둑과 다름없다고 했다. 자신의 생일에 아전들이 바치는 생일상이나 선물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고 했다.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취지와 같은 맥락이다. 정약용은 또 노인과 어린이, 가난하고 병에 걸린 사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잘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강조한 것은 ‘공직자다움’이다. 목민관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오늘날 공직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 안녕’은 공직자다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퀴나 기둥의 역할이 부실하면 교체하거나 보강해주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만,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진정한 반성, 그 후의 ‘뒤늦은 회귀’도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다.
몇 해 전에는 ‘답게 살겠습니다’라는 이름의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흐지부지되고 유명무실해졌지만. ‘답게’ 살 자신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폭력이나 위압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 몸부림이 치열할수록 더 많은 향기를 발산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