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맥간공예를 하는 사람이 있다. 백송(白松) 이상수 선생. 맥간공예 창시자다. 20년 지기라 삶을 엿볼 기회가 종종 있다. 인생을 어쩌면 저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맥간공예만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고지식함이 좋다. 일가(一家)를 이룬데도 그 고지식함의 역할이 컸으리라 짐작해 본다. 원래 한길 인생이 대업(大業)을 이루는 법이니까.
맥간공예는 보릿대(보리의 줄기)를 이용하는 생활공예다. 작게 자른 노랑 보릿대 수백 개 혹은 수천 개를 이어 붙여 예술작품을 만든다. 보릿대의 미세한 결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밝게 빛나거나 음영이 돼 입체감을 나타낸다. 용, 호랑이, 성곽, 나무, 새, 잉어…. 보릿대는 바탕색 흑(黑)이나 적(赤)과 어울려 때로는 은은하고 때로는 강렬하다. 쓸모없어 보이던 조그만 보릿대의 겹겹 이음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 예사롭지 않다.
백송 이상수에게 보릿대가 세상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라면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에게는 점(點)이 그 역할을 한다. 3살 때 사고로 왼쪽 눈을, 4살 때 감염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한 그는 ‘여섯 개의 작은 점’ 창시자다. 별 의미 없던 점들이 이어져 ‘의미’가 됐다. 점들을 이용하면 알파벳과 숫자는 물론 문장 부호까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점들은 시각장애인들을 문맹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세상과 연결시키는 소통의 물길을 열었다.
여섯 개의 점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꿨다. 절망에서 희망으로다. 시각장애인의 삶과 노동현장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헬렌 켈러, 감동적인 음악을 만든 스티비 원더 등 수많은 맹인들에게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요즘은 기술 발달로 일반 문서를 브라유 점자로 변환시켜 주는 소프트웨어도 있고, 종이 위에 돋을새김으로 인쇄해 주는 브라유 점자 프린터도 있다.
보릿대와 점의 이음은 놀라움이고 신비로움이다. 하찮은 보리 줄기와 점 하나가 그러한데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더 말해 무엇하랴. 특히 미성숙한 청년이 누군가의 영향력으로 인해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대표작 《데미안》은 의미 있는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1919년에 발표된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라는 청년이 삶의 익숙한 틀을 깨고 성숙해지는 이야기를 담은 수기형식의 성장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연상(年上)의 친구인 데미안을 만나 정신착란 상태를 벗어나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친구이자 스승 같은 존재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면의 세계를 파고든다. 소설은 두 젊은이의 사춘기와 성장기를 통해 선과 악의 본질을 탐구한다. 소설에는 명문장이 반짝인다. “새는 알에서 나온다. 알은 새의 우주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려면 그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싱클레어가 내면으로 들어가 데미안과 똑같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만남처럼 좋은 인연은 보완이고 확장이다. 또 깨달음이고 해결이며 완성이다. 연결의 힘은 엄청나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 조각조각 나뉜 것들이 따로 놀지 않도록 은근슬쩍 이어준다. 이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일상의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마법이다.
나와 네가 이어지면 우리가 된다. 나 혼자 너 혼자면 남남이다. 수소 분자(H) 두 개와 산소 분자(O) 하나가 만나야 물이 되고, 산소와 질소가 적당한 비율로 만나야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된다. 이으면 있는 거고 끊어지면 없는 거다.
이음을 조금 더 찬미해 보자. 이음은 성과이자 행복이며, 단절은 손실이자 외로움이다. 이음은 효과를 배가시킨다. ‘1+1’이 ‘3’ 일 수도 있고 ‘5’ 일 수도 있다. 시너지효과다. 반면 단절은 힘을 약화시킨다. ‘각자의 열심’이 ‘모두의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1+1’이 ‘2’이거나 ‘1’ 일 수도 있고, 때로는 ‘0’이거나 ‘-’(마이너스) 일 수도 있다. 분산화의 위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어느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람과 맺은 관계의 산물이라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에게 내 삶이 걸쳐 있다고. 2차, 3차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하물며 1차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모 자식 관계, 부부 관계야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과 끈끈하게 잘 지내는 게 진짜 행복 아닌가.
‘잇다 그리고 있다.’ 신문에 실린 광고 카피가 호소한다. 잇는 건 예술이고 소통이라고. 이음은 사랑이고 행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