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 살아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하나만 꼽으라면 내가 단연코 선택할 단어다. 사람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벗겨도 벗겨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양파 같다. 오죽하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알 수 없는 게 사람 속이기에 갈등과 불화가 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매듭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도 한두 개쯤은 매듭이 있게 마련이다. 매듭은 맺히거나 막힌 부분이다. 그 매듭 하나 때문에 온순한 사람이 헐크가 되기고 하고 평소에 합리적인 사람이 어느 순간 꽉 막힌 고집불통이 되기도 한다. 괴팍한 성격도 도벽이 있는 것도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모두 맺히거나 막힌 부분 때문이다.
모든 맺힘과 막힘의 근원에는 소통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시부모 요구를 거절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천사표’ 며느리도 그렇고, 지금까지 참아온 속도 모르고 퇴직하니 변했다고 하는 남편도 그렇고, 잔소리꾼 남편 고쳐 보려다 이혼하게 생긴 아내도 그렇고, 결혼 반대에 거짓말로 속이고 결혼해 놓고 힘들다고 부모에게 손 벌리는 뻔뻔한 아들도 그렇고,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이다.
이 맺히고 막힌 부분을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이 자연스럽게 풀고 뚫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소통의 달인이다. 그러나 꽁꽁 묶인 매듭 풀기가 말처럼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오랜 세월 상한 감정을 내려놓고 갈기갈기 찢긴 상처를 잊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면 소통의 물꼬를 다시 틀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인 SNS(Social Network Services) 발달로 소통 방법은 다양해졌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소통에 대한 목마름은 오히려 커진 듯하다. 외식자리에 가족이 둘러앉아있는데 대화는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광경이다. 친구들끼리도, 심지어는 연인끼리도 마찬가지다. ‘together alone’이다. ‘함께 있지만 홀로’인 사회. 초네트워크 사회의 모순이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매듭’이 보이고 ‘관계의 느슨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서 소속감의 좌절을 느낀다면 오버한 것일까.
소통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관계 강화가 우선일 것이다. 관계 강화를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소통은 알아가는 과정이다. 상대를 알아갈수록 관계는 튼튼해지고 굵어지고 강해진다. 한 가닥의 가느다란 실들이 모이고 꼬여 굵은 동아줄이 되듯이.
관계 강화는 표면적 지식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디에 산다든지 나이가 몇 살이라든지 자녀가 몇 명이라든지, 이런 정보 수준으로는 ‘안다’고 할 수 없다. 심층으로 깊게 들어가야 한다. 생각을 알아야 하고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 깃든 아픔과 고통을, 꿈과 소망까지도 캐치해 내야 한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5년)은 백인 소년 허클베리와 흑인 짐과의 우정을 통해 당시 미국사회가 갖고 있던 인종차별과 폭력, 잘못된 관습을 유머와 풍자로 보여준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은 흑인 노예가 존재하던 미국 남북전쟁 이전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주. 뒤늦게 나타난 술주정꾼 친아버지의 폭력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허클베리는 아버지 몰래 미시시피강을 떠내려 온 통나무를 타고 자신을 입양해 돌봐주었던 더글러스 아주머니 곁을 떠난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무인도에 숨어 있다 왓슨 아주머니네에서 노예로 살다 도망친 흑인 짐을 만난다. 허클베리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짐과 함께 무인도를 빠져나온다. 짐이 붙잡히면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깊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짐의 고단하고 안타까운 삶을 가슴으로 느끼고 아픔을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클베리는 모험 도중 악당에게 붙잡힌 짐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엉뚱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짐을 향한 허클베리의 행동도 ‘앎’과 ‘이해’와 ‘공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설은 소통의 지향점을 생각하게 한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성장하는 것이다. 결국 소통의 본질은 ‘나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소통은 남을 설득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고, 상대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욕심이고 욕망이다.
소통의 핵심은 테크닉이나 기술이 아니다. 진심(眞心)이다. 진솔한 마음, 이것만 있으면 된다. 나는 당신과 잘 지내고 싶다, 당신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 이게 진심이다. 어눌함과 투박함은 진심의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소통이 어려우면 관계도 좋을 리 만무하다. 매듭이 풀리기는커녕 더 꼬인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빗장을 채운다. 심지어는 적대시하기까지 한다. 이게 불소통의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면 ‘사람이 변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대개 변화는 외견상 극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적인 변화는 없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누적적인 과정을 통해서다. ‘서서히’ ‘조금씩’에서 ‘어느새’ ‘갑자기’로 바뀐다. 병아리가 태어나는 과정과 비슷하다. 달걀이 갈라지는 순간은 극적인 변화다. 혁신이고 혁명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작은 변화들에서 단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인생의 매듭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 칼에 두 토막으로 자른 알렉산더 대왕의 칼이 없다. 소통하기 위한 작은 몸부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서서히’와 ‘조금씩’, ‘작은 변화’가 인생의 매듭을 푸는 유일한 길이다. ‘어느 날 갑자기’가 결국, 마침내 오리니. 보이지 않는 벽이 부서지고 서로 연결되고 이윽고 통(通)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