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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Aug 23. 2023

상대가 변하기를 원하는 당신에게

      

분노의 감정이 치솟는 이유


4년 전쯤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친구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다. 컴퓨터 게임 중독 기미가 있는 아들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늘 전쟁터라는 것. 언젠가는 고성(高聲)이 오가던 끝에 부자가 엉겨 붙어 큰 싸움 직전까지 갔다고도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면 화가 나고 돌아버릴 지경이어서 도저히 잔소리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며 이제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다고 하소연했다.     

게임하는 아들에게 화나는 마음은 아버지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권위가 도전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컴퓨터 끄라고 말하는데 어디 감히 눈을 치켜떠?” 분노의 감정이 치솟고 손이 올라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배려와 공감이 있었더라면


친구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들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왜 저럴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에게서 독립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유다. 이런 상황에 적합한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다. 배려와 공감이 있었으면,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래, 게임하며 조금 쉬었다 하도록 해라. 건강이 최고인 거 알지?”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컴퓨터를 검색해 모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게임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친구에게 소개했다. 친구는 아들을 어렵게 설득해 몇 주에 걸친 과정을 무사히 마쳤고 중독이 개선될 기미가 보인다며 고맙다고 전화를 해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원래 소통 욕구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마치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내를(남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두들 세상을 바꾸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톨스토이가 남긴 명언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세상은 그대로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어느 성공회 주교도 생을 마감하는 단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상상력이 무궁무진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아…!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됐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혹시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됐을지….”     



 ‘나의 변화’를 갈망하라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닿는다. 유가의 문장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신기한 일이다. 수신(修身)에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가 달려있으니 ‘수신’에 신경 쓸 일이다. 수신은 마음을 잘 다스리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 아닌가. 궁극의 지향점은 ‘나의 변화’여야 한다. 나의 변화는 ‘내 기준점의 변화’다. ‘어디 감히’를 ‘그럴 수도 있겠네’로 바꾸는 것이다. 결국 자식의 변화도 ‘나’에게 달려있다. ‘자식은 아비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의 잣대를 타자에 강요하는 순간 갈등이 빚어진다. 타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나’로 채우는 건 가짜 사랑이다. 교만이고 폭압이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의 변화’를 갈망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상대를 품에 안 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음은 그제야 나오고 상대의 변화도 그때에야 일어난다.

이 글과 어울리는 시가 있다. 조동화 시인 ‘나 하나 꽃 피어’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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