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년 9월. 충청남도의 한 제철소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죽었다. 흔적도 없이. 누군가 이 기사에 댓글시를 달았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한 네티즌이 이 댓글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각종 인터넷 신문기사에 댓글시를 붙이고 있다. 사교육 열풍을 다룬 2012년 어느 기사에는 ‘우리 반 십육 번/ 박정호가 죽었네/ 영어학원 건너가려다/ 뺑소니를 당했네/ …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라는 댓글시를 달아 통렬하게 풍자하기도 했다. 슬픈 기사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댓글 시인 ‘제페토’. 그는 어떤 눈을 가졌을까. 40대의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하는데.
#2 2016년 9월 22일. 오전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 불이 났다. 불이 난 걸 처음으로 안 그는 가장 먼저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119에 신고를 한 후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캄캄한 새벽이라 화재 사실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이웃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르며 “불이 났어요”라고 외쳤다. 그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건물 5층 옥상 입구 부근에서 유독 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돼 사경을 헤매다 11일 만에 숨진 그를 빼고는. 목소리가 우렁차 성우가 되기를 바랐던 ‘초인종 의인’, 안치범 씨의 나이는 28세였다.
#3 2008년 4월.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사회사업팀에 전화가 걸려 왔다. 중장년 남성의 음성이 말했다. “큰돈을 내기는 힘들지만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돕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드릴 테니 지원이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사연을 보내주세요.” 음성의 주인공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에서 사정이 딱한 환자의 사연을 이메일로 보내면 수술비와 치료비를 대신 내주고 있다. 2016년 6월에는 목돈 1억 원을 병원에 보내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서’라는 내용의 이메일과 함께. 병원 직원들은 이 익명의 기부자를 소설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을 뿐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 않아서다.
《키다리 아저씨》는 미국 소설가 진 웹스터(1876년~1916)가 1912년에 발간한 성장소설이다. 성인기에 접어든 여주인공의 대학생활, 직업, 결혼 등의 관심사를 다룬다. 밝고 명랑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주인공 주디(Judy, 제루샤 애벗)는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익명의 후원자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는 주디를 대학에 보내준 익명의 후원자. 키가 크다는 특징 때문에 주디로부터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주디가 보낸 편지를 받기만 하고 답장은 보내지 않는 미지의 인물이다.
주디에게 부여된 대학 진학 후원 조건은 단 하나. 매달 후원자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리는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대학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상식이 부족해 웃음거리가 되곤 하는 주디는 그럴 때마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을 위로한다. 2학년이 된 주디는 룸메이트인 줄리아의 막내삼촌 저비스를 만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상급생이 된 주디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교지 편집장까지 하게 된다. 주디는 말없이 후원해 주는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가지만 대학생활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끝내 만나지 못한다. 주디는 대학 졸업 후 단행본으로 소설도 내게 된다.
저비스는 주디를 찾아와 청혼하지만 주디는 자신에 대해 다 털어놓을 용기도 없고, 혹시 저비스가 결혼을 후회하게 될까 봐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키다리 아저씨가 큰 병이 났다는 편지를 받고 한걸음에 집으로 찾아간다. 이런! 꿈에도 그리던 키다리 아저씨는 바로 저비스가 아닌가. 사랑으로 가득 찬 주디의 첫 연애편지를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댓글 시인 ‘제페토’, ‘초인종 의인’ 안치범, 병원 환자를 돕는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 2001년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 씨, 1962년 스물일곱 처녀의 몸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전남 소록도에서 43년간 한센인을 돌보다 2005년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모국 오스트리아로 홀연히 떠난 마리안느 수녀와 그의 동료 마가렛 수녀, 일본인으로서 한국 고아 3000명을 돌보며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린 윤학자(1912~1968, 본명은 다우치 치즈코) 여사, 사재 3000억 원을 털어 과학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밝힌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과 공익재단에 4500억 원을 쾌척한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등 존경받는 당당한 부자들, 소설 속 주인공 ‘키다리 아저씨’….
이들은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들이다.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지만 이들은(생존자들은) “특별히 한 것이 없다”라고, “오히려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라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겸손하기까지 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처럼 특별하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본받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본받기 대상은 두 가지. 하나는 따뜻한 시선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세상도 더 밝아질 테고.
성경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마태복음 5장 7절)이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이다. 누가 나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조건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따뜻한 시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세상이 더 밝아지는데 ‘따뜻한 시선’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따뜻한 시선은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의지인지도 모른다. 팍팍한 세상을 살면서도 살맛 나는 느낌을 감돌게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