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반쪽을 건네며/ 친구가 찡긋 웃었다./ 반쪽,/ 전부를 쪼개/ 반의 몫을 내어 준/ 참 따뜻한 말이지./ 반을 준다는 것도/ 반을 가진다는 것도/ 모두 서로의 반이 되는 일이지./ ‘반쪽’이라는 말/ 사실은/ ‘우리’라는 말이지./ 반쪽 사과를 받고/ 나도 씽긋 웃어 주었다.//
조기호 시인(1953~)의 <‘반쪽’이라는 말> 제목의 시다. 몇 번을 읽어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인은 ‘반쪽’을 ‘참 따뜻한 말’이라고 했다. ‘반의 몫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반을 뚝 떼어 주는 건 연민의 마음, 관심의 눈길, 아끼고 베푸는 따뜻함이다. ‘서로의 반이 되는 일’이기에 반으로 나뉘었어도 ‘우리’라는 표현에서는 감사함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은인 이어서다.
클래식 음악계 용어 중에 ‘반쪽’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넘돌이’와 ‘넘순이’다. 연주자가 연주할 때 보는 악보를 곁에서 대신 넘겨주는 사람이다.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하지만 업계 종사자들은 다 알아듣는다. 넘돌이는 갑돌이, 넘순이는 갑순이에서 차용한 듯하다. 영어 표현으로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다.
솔리스트(종종 피아니스트) 옆에 앉은 페이지 터너 역할은 막중하다. 악보를 타이밍에 맞춰 제때 넘겨주지 않으면 큰 혼란에 빠진다. 공연 중에 다음 페이지를 너무 빨리 혹은 늦게 넘기거나 두세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기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대형사고다. 그렇다고 페이지 터너 없이 연주해 보려고 악보를 축소 복사했다가는 연주 내내 실눈을 뜨는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 연주에 혼을 담을 수 있겠는가. 넘돌이와 넘순이, 피아니스트에겐 그야말로 반쪽 같은 존재다.
‘반쪽’이 ‘우리’이듯 협업이 필요한 곳이 어디 연주회뿐이겠는가. 운동하는 선수도,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도, 신문을 만드는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크거나 작거나 돕는 손길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과업이라면 두말해 무엇하겠는가. 나 혼자될 일도 아니고 남에게만 맡겨서도 안 된다.
가족이라는 단어 ‘FAMILY’에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놀라운 뜻이 숨겨져 있는 것도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에게 은혜를 베푸는 반쪽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반쪽의 진정한 의미는 신장과 간의 장기이식(臟器移植)처럼 ‘행동’에 의해 완성된다. 장기이식은 가족애의 결정판이자 최고의 부부애, 최고의 부모애, 어떤 관계이든 최고의 헌신이다. 순수한 주고받음의 과정을 통해 ‘타자(他者) 없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 게 인생사 아닌가.
그렇다고 반쪽 실천이 굳이 장기 이식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다. 사과 반쪽, 우동 한 그릇이면 족할 때도 있다.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은 사과 반쪽처럼 소박하고도 따뜻한 이야기다.
어느 해 마지막 날 밤. ‘북해정’이라는 우동가게를 운영하는 부부가 장사를 마치고 가게 문을 닫으려는 순간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선다. 여인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우동 1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여인의 어려운 처지를 눈치챈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한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네엣! 우동 1인분.” 분위기를 파악한 주인아저씨는 막 꺼버린 가스레인지에 다시 불을 붙인다. 잠시 후 우동 한 덩어리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넉넉한 양의 우동 한 그릇을 내어준다. 여인과 두 아이는 한 그릇의 우동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다음 해 12월 31일 밤, 여인은 다시 두 아이를 데리고 ‘북해정’을 찾아온다. 여인은 부끄러운 듯 1인분의 우동을 주문한다. 주인아주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이고 있는 남편에게 속삭인다. “여보, 공짜로 3인분의 우동을 만들어주면 어떨까요.” 남편이 대답한다.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도리어 부담스러워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못할거요.” 그러면서 남편은 지난해처럼 우동 한 덩어리에 반 덩어리를 더 넣는다.
주인 부부는 여인과 두 아이가 우동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 여인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많은 빚을 지게 된 딱한 사정을 듣게 된다. 다행히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빚을 모두 갚게 되었다는 것, 지난해 주인 부부가 내어준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이 세 사람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그 후로도 매년 마지막 날이 되면 주인 부부는 여인과 두 아이를 기다린다. 가게 내부 장식과 가구도 새로 바꾸었지만 여인과 두 아이가 앉던 2번 식탁만은 그대로 남겨 둔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몇 해가 지나도 여인과 아이들은 가게에 오지 않는다.
그렇게 10여 년 세월이 흐른 어느 해 마지막 날. 드디어 기다렸던 세 사람이 가게로 들어선다. 젊은 엄마와 두 아이는 중년의 부인과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있다. 세 사람은 “따뜻한 우동 한 그릇 덕분에 용기를 내 열심히 살 수 있었다”며 1인분이 아닌 3인분의 우동을 주문한다.
1989년 발표된 《우동 한 그릇》은 북해정 주인 부부의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가 힘든 처지에 있던 한 가족에게 큰 힘을 주었다는 메시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반쪽’이라는 말이 사실은 ‘우리’라는 말이라고.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관심을 갖는 것, 그게 사랑이다.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고 사과 반쪽을 건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