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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Aug 18. 2023

슬픔과 기쁨이 반대말이 아니듯


더 크게 다치지 않아서


10여 년 전 어느 해 여름, 큰 딸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어’하더니 그만 균형을 잃고 맥없이 넘어졌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살며시 배어 나왔다. 2m 거리를 두고 내 눈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걸 보니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이의 무릎 상처를 볼 때면 코앞에서 넘어지던 순간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앞에 철 구조물이 있었는데도 다행히 더 크게 다치지 않아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더랬다. 대표적인 역설의 표현, ‘불행 중 다행’은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다.




의지하고 조율하며 조화를 이루다


퍽 공감이 갔던 영화가 있다. 어른들이 많이 봐서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다. 영화는 반대일 것 같은 두 감정, 슬픔과 기쁨이 서로 의지해야 내면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기도 한다. 슬픔과 기쁨이 맞닿아 있고 눈물과 웃음이 한 몸인 듯 여겨지는 이유다.


슬픔과 기쁨이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듯 세상에 반대라고 알려진 것 중 상당수가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행복과 불행, 밝음과 어둠, 해와 달, 양지와 음지, 동양과 서양, 형과 아우, 스승과 제자, 범인(凡人)과 초인(超人), 바늘과 실, 큰 것과 작은 것, 주인공과 조연, 스타와 청중, 앞과 뒤, 절망과 희망, 수요와 공급, give & take, 일과 휴식, 빠름과 느림, 실전과 연습, 사색과 행동, 사랑과 증오, 만남과 헤어짐,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음악시간에 배운 장조와 단조도 그렇다. 장조=기쁨, 단조=슬픔, 머릿속에 입력된 도식이다. 길고(長) 짧은 데다(短), 영어로도 메이저(major)와 마이너(minor)이니 당연히 반대말로 보인다. 그러나 장조와 단조는 서로 침범하고 어느 순간 꽈배기처럼 얽히며 멋진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서로 의지하는 것이고 조율하는 것이며, 영향을 미치고 조화를 이룬다.   




서로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문학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대표작인 《죄와 벌》. 오만하고 지적이며 젊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살해한 직후부터 죄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다가 맑은 영혼을 가진 창녀 소냐의 사랑에 힘입어 죄를 고백하고 자수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생각해 낸 초인사상에 따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세상의 모든 법률과 제도와 도덕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범인(凡人)들이고, 다른 하나는 범인들이 지켜야 할 세상의 온갖 제약을 무시하고 행동할 수 있는 초인(超人)들이다. 그런 논리에 의해 살인하게 되고 시베리아로 유형가게 된다. 소설은 유형지에서 소냐의 사랑과 성경 복음서에 의해 구원받고 갱생의 삶을 살게 된다고 결론을 맺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그려낸 두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처럼, 중요한 건 서로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얼마나 서로 존중하며 잘 어울리느냐의 문제다. 얼핏 반대로 보이는 둘의 만남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건 아름답고도 활기차며 건강한 일이다.



만남과 융합, 그리고 빅뱅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익숙한 듯 낯선 것들의 만남과 융합으로 연결되고 확장되고 빅뱅이 일어나는 것 아니던가. 낯선 것들의 흔치 않은 ‘의외의 만남’은 전방위에서 이루어진다. 디지털에선 컨버전스(收斂․convergence)라 부르고, 학문에선 학제 간 연구(學際間硏究․interdisciplinarity), 생물학에선 통섭(統攝․consilience), 마케팅에서는 컬래버레이션(共同作․collaboration)이라고 부른다. 만남의 힘, 연결의 힘이다.


심리 상태인 ‘슬픔’과 ‘기쁨’의 경제학 버전은 ‘결핍’과 ‘풍요’다. 슬픔과 기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내면의 평화라면, 결핍과 풍요가 적절히 어우러지면 튼튼한 사회적 안전망이 만들어진다. ‘사회의 선진성’과 ‘공중의 선’은 먹고살만한 ‘여유의 집단’이 생존의 문제에 두려움을 떨고 있는 ‘필요의 집단’에 대해 배려할 때 완성된다.     



상대의 존재에 감사하기


두 감정, 슬픔과 기쁨을 정치학 버전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극단으로 보이는 보수와 진보가 적절한 예다. 이 둘은 성향의 차이, 혹은 뇌 구조의 다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보수는 진보의 배려와 공평성을, 진보는 보수의 충성과 권위를 배울 것은 제안한다.     


얼핏 반대로 보이는 둘이 어울리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달으면 파국은 순간이다. 파국은 파멸로 이어진다. 그래서 필요한 게 ‘상대’에 대한 연민이고 ‘상대의 존재’에 대한 감사다.   

  

슬픔과 기쁨, 결핍과 풍요, 신세대와 기성세대, 보수와 진보는 반대말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야 할 대상, 이끌어주고 밀어주며 챙겨야 할 고마운 존재들이다. 마치 서로 정답게 늙어가는 부부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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