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타오르는 영화
이 감상평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호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가 소중한 사람들은 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내겐 대담한 스토리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영화로 느껴졌다. 너무 궁금했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뜨겁게 만드는지. 2시간 내내 이해해보려고 애썼지만, 영화의 끝에서 든 생각은 '왜 남이 사랑하는 걸 계속 이렇게 보고 있어야 할까'라는 거였다. 이하는 왜 몰입되지 않았는지 나름의 생각이다.
[단독] 그림을 그리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부터 공감이 안 돼
마리안느의 말처럼 그림을 그릴 땐 그려야 하는 대상을 계속 응시해야 한다. 사랑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물화를 그린다는 건 굉장히 사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한적이 없다. 좋아하는 걸 보면 그리고 싶어지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상대에게서 느낀 모든 것이 그림에 담기길 바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리는 존재에 몰입할 뿐만 아니라, 그림엔 단순히 색채 도구 그 이상의 감정들도 소모된다. 그림을 그리는 공간, 음악, 그 사람을 떠올리는 감정 같은 것도 들어간다. 마치 애정이 담긴 사진처럼, 그림에도 애정이 담긴다. 그리는 사람은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어디에서 더 밀도를 올릴지, 더 몰입하고 끊어낼지, 어느 점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를 담는다.
나는 이 과정을 기대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건 없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귀 연골이 어쩌구 했을 때 이후엔 뭔가 나오겠지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엘로이즈에게 비평 받은 이후 조금 더 생동력과 질감이 생긴 두번째 그림만 있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엘로이즈는 결혼을 위해 그려질 자신을 거부하기에 모델을 하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이런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산책친구'로 둔갑해 그의 곁에서 그를 관찰하고, 그를 그림으로 담는다. 예상과 달리 이 복잡한 과정과 마음은 굉장히 조용하고, 갑작스럽게 이뤄진다. 이를 소위 영화판에선 '불친절한 영화'라고 하는데, 난 영화가 굳이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불친절이고 자시고 간에 사랑을 위해 화가 혹은 그림 그리는 역할만 그럴듯하게 따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생각했다. '회상 장면 같은 걸 넣는 건 너무 드라마 같을 수 있어. 그래. 어쩌면 뮤직비디오 같았을 수도 있지.' 그래도,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그래. 상대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상대가 타자화될 수 있는 장면은 없앴겠지, 싶어도 너무너무 갑작스럽다.
2시간 내내 나는 내가 퀴어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정말 빻은 생각으로 남녀의 구조로 치환해서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은 이해가 갔으려나 싶었다. 그렇지만 이성으로 치환된 상상 속 둘의 사랑도 여전히 너무 갑작스러웠다.
의도한 무미건조한 연출, 그리고 타오르지 못한 나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은 하녀 '소피'였다. 소피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이자, 물러서는 법 없이 내뱉는 사람이다. 고리타분한 신화 이야기에 화내고, 말도 안 된다고 하고, 갑자기 밤 중에 빵을 꺼랜 마리안느를 보고 갑작스러워하고, 소피를 보는 내내 '슬픔은 슬픔, 기쁨은 기쁨'처럼 보였다. 이 무미건조한 영화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 외에 가장 중요했을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엔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을 순서대로 꼽으라면, 단연 엘로이즈가 1위다. 엘로이즈는 꽤 늦은 초반부에 등장해서 갑자기 사람을 놀라게 한다. 큐레이터는 엘로이즈를 쫓는 시선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정말 시선이 중요하다. 이 영화엔 시선 외에 영화의 서술법이 될 수 있는 음악 한 톨도, 중반부의 축제 장면까지 들리질 않기 때문이다.
위 장면이 등장하기 전까진 들리는 소리라곤 장작이 타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빵을 꺼낼 때 찻장에 접시를 꺼내는 소리, 접시를 책상에 놓는 소리, 물을 데우고 뜨거워진 물이나 국을 따르고, 덜어내는 소리, 걸음 소리, 문을 열고 닫는 소리, 파도소리, 바람소리 등등으로 이뤄져 있다. 자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내내 비춰지는 영상 속 인물들의 옷이며, 인테리어며 마치 오래된 특선 명작 극장을 보는 느낌도 난다.
그런 고요한 적막한 분위기를 타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만나기 전, 소피로부터 엘로이즈의 언니 소개를 듣는다. 그는 결혼을 거부하다 절벽에서 자살한 것 같다며 그 이유는 비명소리 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이 말을 듣고 심란해 죽겠는데 엘로이즈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막 바다의 끝까지 달려갈 것처럼 벼랑을 향해 뛰어간다. 그러다가 벼랑 맨 끝에서 이렇게 달려보고 싶었다며 마리안느와 관객을 안심시킨다.
큐레이터의 설명처럼 이 영화엔 시선, 표현법 등등 업적을 남길만한 요소들이 많았지만, 크게 만족감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일부러 상하 관계없이, 동등하게 지켜볼 수 있도록 시선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들이 주인인 엘로이즈, 그림 주문을 받은 화가 마리안느, 하녀 소피의 식사 준비장면이고, 이 셋을 평등한 위치에서 그렸다는 것도 잘 알겠다. 일상에서 잘 느껴본 모습이라서그랬을까. 큐레이터의 말을 빌려 '자매애'가 드러난 장면은, 내게 있어선 가장 편안하고 따뜻했던 장면이었다.
갑작스러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트리플H처럼 사랑하고 있는 둘 사이에 낀 소피가 낙태를 하고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랑 얘기하다 뒤에 있는 소피에게 잠자고 있냐 묻고, '아니'라고 하자, 소피를 벽난로 앞에 자리를 마련해주어 눕게 하고, 마치 오전(혹은 오후)에 있었을 낙태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마리안느에게 이를 그리라고 한다.
정확히 그 장면서부터 나는 몰입하기를 멈췄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아픈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갑자기 그림을 그리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에 있던 배드신까지.
엘로이즈는 중간중간, 각인시키듯 갑작스럽게 귀신처럼 나타난다. 큐레이터는 이를 엘로이즈의 언니와 오르페우스 신화를 이야기하며 등장했으나 집중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여자의 존재일수도 있다고 하는데…. 아. 보고 들을수록 직설적이었으면 하는 게 모호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게 직설적인 느낌이다.
퀴어 in 영화 = 사랑?
제아무리 이 세상에 고프고, 쉬우면서도 복잡할 수 있는 게 사랑이어서 이를 풀어내는 게 가장 공감을 살 수 있는 소재라 하더라도, 극에서 왜 퀴어라는 존재는 꼭 사랑을 해야 하나. 특히 여자 둘 이상은 왜 꼭 사랑을 증명하듯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존재로만 그려져야 할까. 그들의 사랑에 몰입되기도 전에 배드신이 등장했고, 그렇기에 착취하지 않은 배드신마저도 불쾌하게 다가왔다. 침대에서 맨 가슴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장면도, 겨드랑이에 마약을 바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신음을 내는 장면도 불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전까지 한국드라마에서 일부러 호응에 마땅히 팔리기위해 브로맨스처럼 보이려고 연출한 장면들을 보면서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까. 퀴어와 엮인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이 모든 질문은 이후에 큐레이터분께 질문하며 일정 해소되었는데,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이 영화를 아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큐레이터는 이 장면에 대해서 보건상으로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서 낙태는 팔리지도 않고, 기록되지 못할 가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엘로이즈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기존 질서에 반(反)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했다. 또한, 큐레이터는 감독의 말을 소개하며 소위 뮤즈라 하면, 남녀 관계를 떠올린다(대개 화가는 남성, 뮤즈는 신비스러운 여성)는 말을 전했는데, 뮤즈나 화가에 성별을 고정시켜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큐레이터는 대개 관객들은 저 둘이 도망가면 안 되냐고 질문하기도 했다는데, 그에 관해선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그 시대 안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서로를 위한 가장 건강한 선택이었다는 데 동의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보니 프랑스란 국가의 문화적 특성과 이 사회의 오래된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몹시 의미 있는 영화는 맞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의 영화를 해체시키는 좋은 지식을 들었지만, 나는 결국 이 영화에 타오르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계속 생각했다. 나는 왜 프랑스인이 아닌가. 내가 지금 사랑할 준비가 안 돼서, 사랑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런가? 해도 사랑은 준비됐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왜 이리 따분하고 지루했을까. 넷플릭스에 뜨면 볼까 고민했던 걸 영화관 안에서 다시 고민하게 될 줄이야. 대체 왜 그랬을까. 몇 번을 곱씹어도 갑자기 달리다가 갑자기 웃고, 옷이 불에 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철퍼덕 쓰러지고 다시 뻣뻣하게 바다를 응시하는 엘로이즈만 생각날 뿐이었다.
엘로이즈의 어머님의 신청곡 god <관찰> 띄워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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