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줘. 네가 누군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하 리뷰 내용은 개인적인 견해로, 디즈니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겨울왕국 2>가 개봉한다길래 냉큼 넷플릭스에서 1편을 봤다. 아니, 그런데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아이패드의 협소한 모니터 크기 때문일까, 어마 무시했던 명성과 유행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앞서서 <주토피아>나 <주먹왕 랄프>, 기타 등등의 예능, 드라마를 많이 봤었기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이 대사 대신 노래를 부르는 게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서 10분 후, 나도 모르게 '양말이 어디이쓰을까~'처럼 '포 더 퍼슽 타임 인 포레버~'을 흥얼거리게 될 줄이야.
안 본 사이에 <겨울왕국 2>의 엘사도, 올라프도 모두 철이 들었다. 전작이 청소년기에 겪는 사춘기였다면, 이번 2편에서는 어른의 오춘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겨울왕국 1>이 하나의 일기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겨울왕국 2>는 조각난 흑백사진을 맞추는 느낌이다. 1편은 2편보다는 이해하기 쉬웠다. '남과는 달랐던 사람의 이야기 : 마음의 문을 닫았다 열었다'라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성장 스토리였다면, <겨울왕국 2>는 조금 난해하다.
두 편 모두 '마법'이란 판타지 요소이자 갈등 요소는 동일하게 등장한다. 둘의 차이는 갈등을 푸는 실마리에서 차이가 난다. 1편에서 평범한 인간 세상에서도 동일한 해결 요소가 될 수 있는 '사랑'이란 확실한 깨달음으로 결론짓는 반면, 2편은 '마법'이 없으면 인간 세계로 돌아온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모험과 해결책은 비현실에 가깝다. '모험'이나 '무시하고 싶지만, 나를 드러내야 하는 순간' 같은 일들은 이 세상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모험과 나를 드러내는 건 만화영화처럼 확실한 해피엔딩만 주진 않으니까 말이다.
엘사와 안나, 다른 캐릭터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관객은 엘사가 다섯 정령들의 존재를 찾는 것처럼, 5년 동안 흩어져있던 고난과 애틋함을 엘사의 감정선과 함께 찾아간다. 엘사가 알토할란에서 마지막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자 얼음벽에 비친 주마등에서 '울컥!' 감동이 올라온 것은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으랴.
극 중 OST 곡(이하 넘버)들은 전작보다 촘촘한 감정선과 함께 폭발력 또한 커졌다. 전작에서 'Let it go'란 노래 하나가 가장 큰 호응을 받았다면, 이번엔 감정이 폭발되는 곡이 두 곡으로 나눠진다. 'Into the unknown'이나 'Show yourself'가 그것이다. 이 곡을 통해 우리는 한 번 느껴봤던 감정과 느껴보고 싶은 미래를 그린다. 'Into the unknown'에선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 떠나고자 마음먹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했다면, 'Show yourself'에선 이제껏 겪었던 모든 고난은 온전히 행복할 수 있게 만든 이유라고 느끼고 싶게 만든다. '전체 연령가'란 등급처럼 디즈니의 영화는 어린이도, 어른이들도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시사점을 하나씩 안겨준다.
고난스러운 일들을 겪고 있는 지금에 필요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 엘사의 주마등 하나를 다시 보기 위해서 3차를 찍었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영화다. 이 리뷰는 <겨울왕국>을 보며 발견한 나름의 다섯 가지 요소들을 기록한 관찰 기록지다.
1. 올라프는 엘사다? (부제 : 보라색으로 본 올라프와 엘사와의 관계)
올라프는 5년 동안 정말 많이 철들었다. '철들면 죽는다'는 사망 플래그를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이 올라프는 내내 인간적 성숙과 고뇌에 관한 철학적인 말들을 많이 한다. 그리고 올라프는 죽는다.
올라프가 죽었을 때 눈송이 무덤 위에 떨어진 보라색 꽃은 1편에서 올라프가 여름에 힘껏 맡았던 향기의 꽃이다. 이 꽃의 정체는 아렌델의 국화 - '크로커스'다.
크로커스(crocuses)의 꽃말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이다. 지중해 연안에서 피는 이 꽃이 가을에 피면, 섬유유연제로 유명한 '사프란'이란 이름이 붙는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을 '눈 속에서 피는 꽃'이라 부른다.
참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 - 2016년 3월호, "[꽃의 시간] 크로커스", 트리인포(treeinfo.net)-식물도감 "크로커스"
1편에서 얼음에 찔린 울라프는 마치 엘사의 마법으로 인해 안나의 심장에 박힌 얼음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소중한 이에게 상처를 엘사 또한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줬을 것이다. 이를 비롯해 2편에서 엘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올라프, 올라프의 무덤 위에 뿌려진 보라색 꽃 - 크로커스의 꽃말을 통틀어 보면, 엘사가 자연과 인간을 잇는 다리였던 것처럼, 올라프는 엘사와 안나를 잇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엘사가 성에서 <Into the unknown>을 부르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뒤에 올라프가 숲에서 사만다를 찾으며 자기는 언제 어른이 될까하고 노래를 부를 때 물에 비친 녹(Nokk, 엘사가 타고 다니는 말)을 볼 때와 겹친다. 물에 대한 기억을 아는 올라프, 물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는 존재 엘사. 엘사가 아토할란에서 2번째 각성을 하고, 펼쳐진 얼음 주마등 속에서 엘사는 안나와 올라프를 만드는 추억을 떠올리는데, 이때 엘사가 올라프의 목소릴 내며 '따뜻한 포옹이 좋아'라고 얘기한다. 엘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올라프는 동시에 사라진다. 결말에서도 올라프를 다시 만들고,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 또한 엘사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올라프는 일찍 철이 들었어야 하는 엘사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엘사는 안나와 항상 같이 있어 줄 수 없어서 안나 곁에 올라프를 만들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2. 덴마크 작가에게 디즈니가 헌사하는 방법
엘사가 죽음에서 깨어나고 물에 빠질 때, 엘사의 옷이 지느러미처럼 보인다. 마치 '인어공주'처럼.
디즈니의 인어공주를 보면 인어공주 아리엘은 인간 세상으로 가지만, 다른 모습으로 생각해본다면 인간과 인어를 잇게 한 사람이다. 엘사 또한 그런 존재다.
엘사가 아토할란에서 과거를 볼 때, 이두나(엘사, 안나의 엄마)가 아그나르(엘사, 안나의 아빠)에게 뭘 읽고 있냐고 했을 때, 아그나르는 덴마크 작가의 신작을 읽고 있다고 대답한다. <겨울왕국>이 덴마크 작가인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서 실마리를 가져온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디즈니가 영감의 출처를 알려주는 법처럼 보였다.
한 편으로 이 장면을 보며 같은 글 읽어도, 어떤 공간이나 읽는 사람에 따라서 글이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 <눈의 여왕>은 <겨울왕국>과는 다르게 조금 더 잔인하고, 희망보단 무서운 오한이 느껴지는 글이니까 말이다. (그렇죠? '한스' 크리스안 안데르센?...)
3. 서로의 세상에서 한 번씩 서로를 구했다.
아그나르가 어릴 적 노덜드라 숲에서 이두나에 의해서 구해졌을 때, 아그나르는 이두나에게 안겨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난파했을 땐 아그나르가 이두나를 안고 있었다. 1편에서 얼어붙은 안나를 엘사가 살렸던 것처럼, 이번엔 안나가 엘사를 살린다. 모두 서로의 세상에서 한 번씩 서로를 구했다.
4. Show Yourself
이번 <겨울왕국 2>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을 꼽으라면 엘사가 아토할란에서 자신이 5번째 정령임을 드러냈을 때, 얼음벽에 펼쳐진 어린 시절부터의 모습들을 보던 순간을 꼽고 싶다. 항상 성공했다고 느끼는 지점엔 과거의 시련들이 비친다. 나답게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시련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유의미해진다. 가장 자기 다운 모습으로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가장 나답지 못했던 순간과 나를 드러내고 편안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생각이 났다. 보이지 않고서는 나 다울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가장 힘들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쯤 엘사였다. (여러 번 일지도)
5. 설레게 하는 힘
<겨울왕국 2>는 두 번 놀라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기획과 연출력에 한 번 놀라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번 더 놀라게 한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사람들이 나가지 않았고, 짧은 쿠키 영상을 기다리며 스텝 롤을 보게 한다. 영화관 층마다 울려 퍼지는 '아아아아~' 소리까지. 스텝 롤을 다 보게 만드는 디즈니의 힘은 어디서 올까?
이런 적이 있었다. 한 8년 전쯤에 한예종에서 시민예술학교로 영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주마다 다른 주제로 수업을 받았는데, 영화 수업은 짧은 영화 영상과 함께 교수님이 코멘터리 하듯이 감독과 작품에 관해 설명해 주시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으레 영화를 보는 방식이 그러하듯 영상이 시작될 땐 불을 끄고, 끝날 땐 켰는데, 도와주던 학생이 스텝 롤이 올라갈 때 불을 켰다. 그때 교수님이 갑자기 엄청 단호하게 열이 섞인 목소리로 화를 내셨다.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왜 불을 켜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보통 영화관에서 스텝 롤이 시작될 땐, 이꼬르(=) 영화가 끝났다는 말로 영화관의 불도 켜지고 사람들은 재빠르게 나가는 시간인데, '영화가 끝나지 않았다'라니. 이후론 웬만히 영화를 볼 땐 스텝 롤을 끝까지 보는 일이 많았다. 물론 가끔 눈치에 자리에 붙어있기가 민망할 때도 있지만, 나름의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심에 감사하단 혼자만의 의식이라 생각하면서 스텝 롤을 지키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아주 짧은 쿠키 영상마저도 기다리게 만들고, 그 중간에 스텝 롤을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를 만든 <디즈니>가 가히 대단하게 느껴졌다. 관객과 제작진 모두가 서로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하는 힘, 기다리고 설레게 하는 힘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평) It's your turn, I'm ready to learn
<겨울왕국 1>이 외로움이나 고독, 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던 이유들 속에서 아파했던 사람들이 깨어났던 감동과 위로가 있었다면, <겨울왕국 2>는 '두려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란 포스터 카피처럼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숨겨진 세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Show your self>는 다섯 번째 정령이자,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다.
<겨울왕국 2>를 보고 난 후, 나에게 미지의 세계는 무엇일지, 내겐 어떤 두려움이 있는지 많이 생각했다. 한동안 지치고 힘들어서 철없이 그 시간들을 내게서 빨리 멀어지게 하려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두려움을 이겼던 지점이 생각이 났다. 2019년에 크게 두려웠던 것들엔 내 미래도 있지만, 제일은 나를 만든 동네가 재개발로 천막과 용역과 같은 낯선 것들에 파괴되는 모습이 가장 두려웠었다. 무서웠고, 피하고 싶고, 울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서 느낀 시간이었고, 이제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이웃 주민들을 만나야 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을 때가 가장 두려웠다.
오늘 마지막으로 나의 동네에 정들었던 곳들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생각건대,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두려운 곳에 여러 가지 표정으로 가는 것이다. 슬픈 표정, 그리운 표정, 기쁜 표정, 설레는 표정 등 여러 가지의 표정들, 마음을 가지고 여러 번 가야지 무너진 다음의 세상이 보이는 것 같다.
다사다난한 20대를 겪고, 청년의 성숙기를 보내고 있는 나는 엘사처럼 이 모든 익숙하고 소중한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다. 모험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엘사처럼 강하지도, 특별한 능력이 있지도, 다음 세상이 기대되진 않지만, 그래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언젠가 두려운 순간이 올 테지만, 문제없다. 난 배울 준비가 됐어.
I'm dying to meet you
Show yourself
It's your turn
Are you the one I've been looking for All of my life?
Show yourself
I'm ready to learn
- <겨울왕국 2(Frozen2)> Show your self 가사 중에서
7. 그 외)
'전체이용가'란 말을 입증이라도 해 보이듯 부모님이나 연장자들을 신경 쓴 듯한 크리스토퍼의 독백 신(SCENE)을 보면서 <가사를 모르고 들으면 좋은 노래>가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퀸의 앨범커버를 패러디한 것도. 디즈니는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나도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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