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기적이 될 수 있는지
모처럼 촘촘한 드라마를 만났다. 이틀 만에 18회를 몰아봤다. 인스타에서 강하늘의 구수한 사투리 연기와 시골 총각의 패션이 유행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중반부까지 온 드라마를 쉽사리 시간을 투자해서 보긴 엄두가 안 났다. 버스 안에서 "나 동백꽃 필 무렵 봐야 해. 전화 끊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1. No 뻔 No 허세, Yes 펀(Fun) Yes 성실
웬만해서 1화부터 이렇게 매력적이기도 힘들 것 같은데, 이 드라마 참 재밌다. 1화를 보고 나면 2화는? 그럼 3화는? 그럼 4화는? 아니 이렇게 재밌다고? 다음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를 외치게 한다. 미친 드라마다. 예쁘고 멋져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없다. 이런 드라마, 정말 오랜만이다. 이 드라마는 왜이리 재밌을까?
<동백꽃 필 무렵>엔 뻔한 연출이 없다. 7-10년 전만 해도 영화연출이 TV 드라마에 등장하면 ‘오와-’했는데, 장르물이 대세가 되면서 이제는 웬만한 연출엔 쉽게 감탄하지 않게 됐다. 연출에 있어선 TV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장르를 불문하고 미디어 콘텐츠는 크게 성장했다. 둘의 호흡의 차이는 여전했지만,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유튜브나 미디어 콘텐츠 소비가 막대하게 커지면서 시청자들이 영상을 보는 관점도 명민해졌다. 웬만히 뻔한 연출을 벗어나지 않으면 ‘재미’가 있기 어렵다. TV 속에 등장하는 콘텐츠들이 사회적 문제를 애써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땐 지루하고 게을러 보인다. <동백꽃 필 무렵>은 성실히 현실을 담아냈다. 재미를 위해 현실을 지우지 않았다. 한부모가정, 미혼모, 육아, 온전한 사회적 형태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가해지는 편견들과 사회문제를 그대로 표현했다.
2. 자연스럽고 부지런하게
<쌉니다 천리마마트>, <녹두전>이 애초에 웹(Web) 형 센스를 가진 웹콘텐츠의 실사화라면 <동백꽃 필 무렵>은 현실을 그대로 TV 드라마에 가져오면서 웹 형 센스를 보여줬다.
다른 드라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타이포그래피나, 등장인물의 독백을 보며 <유미의 세포들>이 생각났다. 유미의 생각과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세포들의 대화, 다른 등장인물들의 독백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동백꽃 필 무렵>의 독백은 일일드라마처럼 일부러 구구절절하지도 않게, 등장인물들을 다면적으로 비추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타고 흐른다. 그리고 실시간 반응을 엿볼 수 있는 웹 콘텐츠처럼 <동백꽃 필 무렵>의 이야기는 지금 인터넷에서 얘기하는 사회 담론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 우스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지만, <동백꽃 필 무렵>의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3. 보통의 영웅들
<동백꽃 필 무렵>의 코믹적 연출을 보면서 생각난 드라마가 있다. <열혈사제>다. 열혈사제도 연출에 있어선 생각도 못 한 만화적인 연출들로 일반적인 드라마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둘은 가장 보통의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보통의 존재들을 일깨운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둘의 전개는 완전히 다르다.
<열혈사제>는 선량한 시민을 등쳐먹는 악(惡)의 존재인 카르텔이 존재하고, 범상치 않은 등장인물들로 선과 악의 갈등 끝에 다다라 선이 이기고야 마는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엔 악인과 선인이 뚜렷하게 나뉘어있지 않다. 물론 <동백꽃 필 무렵>에도 까불이라는 연쇄살인마란 악인은 존재하긴 하지만, 악의 존재를 해결하는 문법의 차이에 있어 <동백꽃 필 무렵>은 덤덤하고 보다 일상적이다.
그간 장르물이 대세였던 드라마 판에서 악인은 너무 멋졌다. 배우 팬들은 한 번쯤은 ‘우리 뫄뫄 사이코패스 역할’ 한 번 해봤음 좋겠다 할 정도로 사이코패스는 냉혈하고, 사연이 있으며 쉽게 벗어나지 못한 마성의 매력을 가진 인물로 다뤄졌다. 그런 악인에겐 항상 우울이란 아우라가 존재하고, 그들은 매력적으로 연출된 어두컴컴한 아우라를 등에 업고 세고 강한 존재로 그려졌다. 심지어 그런 악을 완전히 잘 표현한 배우에겐 ‘미친 연기력’이란 수식어도 붙는다.
그간 드라마, 영화 장르를 마다하고 사이코패스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강한 존재로 고군분투하는 수사물에 등장하거나 끝내 등장인물의 주변 인물을 죽게 하고, 등장인물의 각성 요소를 만들어내며 ‘치명적인’ 존재로 활용됐다. 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은 이런 그간의 문법을 철저히 깨부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사이코패스인 까불이는 대낮에 향미 500잔에 뚝배기를 맞고 쓰러진다. 강하고 멋진 남자의 모습이 아닌, 쪽수 앞에선 별수 없는 범죄자로 그려졌다.
물론 까불이를 두고 파생되는 갈등이 있다는 것도 안다. 단순하게 본다면 동백의 각성을 위해 향미의 죽음이 쓰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애초에 동백이(공효진 분)는 각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동백이는 덤덤하게 동백이었다. 동백이는 ‘갑자기’ 강한 존재가 된 게 아니다. 원래 동백은 강했다.
소위 알탕영화에서 여자의 죽음을 전시하고, 여자의 죽음으로 주인공이 각성하는 것과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본다. 동백이를 위험한 순간에서 지킨 것은 용식보다는 옹산의 언니들이었다. 까불이와 향미의 희생은 동백의 꽃말의 강조 요소, 전개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호기심 촉매제인 것은 맞지만, 그간 다른 장르물에서 보인 뻔한 맥락으로 해석하긴 아깝다. 달리 보면 다시 까멜리아로 돌아온 향미의 각성(다짐)이 두드러진 죽음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동백꽃 필 무렵>은 게으르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성실함처럼 <동백꽃 필 무렵>은 부지런히 악은 별수 없는 악으로 담아냈다.
<동백꽃 필 무렵>은 단순히 연쇄살인마를 둘러싼 옹산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데 힘을 쓰는 게 아니라, 미혼모 가정, 사회의 편견 속에서 자립하는 여성의 서사에 특색을 뒀다.
<동백꽃 필 무렵>은 최근 드라마 판에서 쉽게 꺼내 본 적 없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아주 직설적으로. 그간 영화‧드라마에서 ‘술집 여자’가 창부나 남자들의 연민의 대상, 유희적 요소로 쓰였던 것과는 다르게 술집과 여자란 수식어를 분리해서 별개로 수식했다. 그들이 파는 건 술이지, 웃음이었던 적 없다는 단호한 동백의 대사처럼. <동백꽃 필 무렵>은 단호하게 여자는 쉽게 연민하거나, 희롱을 당할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4. 용식에게 배운 자존감 수업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용식이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낮춰서 자신을 표현한 적이 없다. 자신의 마음에 비겁한 적도 없다. 자신 없을 순간에도 한 번도 느끼한 허세를 보인 적이 없다. 거절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분노할 줄 알고, 사랑을 말할 줄 안다. 용식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다. 용식은 성숙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마음을 순수하게 표현하고, 불의에 맞설 줄 안다. 옳은 것엔 물러서는 법이 없다. 좋아하고, 선이라 믿는 것들엔 지는 법이 없다. 져주는 것처럼 보인 적이 없다. 용식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냥 자신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건강하게 굳건히 자기를 믿고 주변 사람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어떻게든 읽혀보려고 부제목에 <자존감 수업>이라 썼지만, 사실 나는 ‘자존감’이란 말이 시도 때도 없이 쓰이는 게 정말 싫다. 언제서부터 자존감이란 말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특히나 약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존감이란 말은 흔히 쓰이는 고유명사가 된 기분이다. 감수성이 풍부 할수록 자존감이란 말로 공격당하기 쉽다. 자존감이 쉽게 상대를 후려치는 명분으로 쓰이는 것이 싫다. 사람에겐 자존감 너머의 어떤 말들과 모습이 있고, 한 단어로만 쉽게 넘겨짚긴 아쉬운 면들이 많다.
자존감이란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자존감은 그 어떤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비겁하지 않은 모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건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자기 내면의 깊이를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나서야 자존감이란 말의 운이라도 떼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비겁해지지 않아도 되는 환경과 기회가 우선 주어져야 한다. 안전한 시간 속에서 사회와 자기 자신을 오래도록 바라본 사람은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과 상대에게 배려를 아는 진실한 사람, 자신의 마음에 비겁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단단한 자신을 얻는다.
편견을 지우고 자신을 지지하는 힘, 자존감이란 단어 하나만으로 퉁치기 아쉬운 세밀한 배려와 성실한 사랑을 용식에게서 배웠다.
5. <동백꽃 필 무렵>이 그대들에게 보내는 찬사
"동백 씨, 약한 척하지 말아요. 고아에 미혼모인 동백 씨. 모르는 놈들이 보면, 동백 씨 박복하다고 쉽게 떠들고 다닐지 몰라도요. 고아에 미혼모가 필구를 혼자서 저렇게 잘 키우고, 자영업 사장님까지 됐어요. 남탓안하고요. 치사하게 안 살고. 그 와중에 남보다 더 착하고, 더 착실하게, 그렇게 살아내는 거. 그거, 다들 우러러보고 박수쳐줘야 할 것 아니냐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남들 같았으면요. 진작에 나자빠졌어요. 근데 누가 너를 욕해요! 동백 씨. 이 동네에서요. 젤-로 세고요!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해요. "
용식이 동백이를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작가는 오늘도 편견과 힘겨운 삶을 이겨내느라 지친 당신이 무너지지 말라고, 그대들을 지켜주려 한다. 덧붙여 난 <동백꽃 필 무렵>의 어머니의 서사가 지고지순한 희생의 삶을 답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의 삶이었고, 우리 동네를 둘러싼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 억척스럽고 여유 없는 존재들, 강한 자들에게 희생당하고 마는 존재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대들은 그대들대로 강한 사람들이라고,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재단하지 말라고 외치는 포효처럼 느껴졌다.
꽃을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꽃이 핀 걸 안다. 우리는 9월부터 시작해 3개월을 기다려 11월에 핀 동백꽃을 봤다. 용식이 동백에게 준 생일 카드처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축하받지 못했던 삶 같았다면 매일 생일 하자. 그대들이 여태까지 살아온 몇 년의 삶은 그대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감히 얘기해주고 싶다. 젤로 강하고, 젤로 훌륭하고, 젤로 장하다.
혼자라 느껴질 때 <동백꽃 필 무렵>이 보여준 이야기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기억이 될 수 있는지를 되새기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마침내 드러날 그대들임을 잊지 말자.
“쟨 좀 박복하잖아.”
여기 편견에 갇힌 한 여자가 있다.
아무도 그녀의 행복을 예상치 못한다.
우리 속 무심하고도 사소한 시선들이 그녀를 쉽게 재단하지만, 우리 속 무심하고도 사소한 배려들이 그녀의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편견에 갇힌 한 사람이 조금씩 틀을 깨고 나와 포효하기까지.
그 사소하지만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낸 건
평범한 듯 안 평범한 난 놈, 용식이었다.
한 사람에게 냅다 퍼붓는 우레 같은 응원!
‘당신 잘났다, 최고다, 훌륭하다, 장하다!’
이 우직한 응원이 그녀의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기적이 될 수 있는지...!
여기 순박섹시란 새 장르를 발칵 열 촌(놈옴)므파탈 황용식이와 성장, 아니 각성하는 맹수 은(근걸)크러쉬 동백이가 보여줄 것이다.
편견에 갇힌 여자가 저를 가둔 가타부타를 깨다 못해 박살을 내는 이야기.
그리고 그 혁명에 불을 지핀 기적 같은 한 남자의 얘기.
분명 뜨끈한 사랑 얘긴데, 맨날 사랑만 하진 않는 얘기.
'진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 <동백꽃 필 무렵> 기획의도
동백꽃을 보면서 많이 생각났던 가사의 첸의 <꽃(Flower)>
꽃이 핀다 따스해진 해를 담아
작은 꿈들이 되어
움츠려 있던 꽃잎이 하나둘 피어온다
차갑게 얼어붙은 계절이
어느새 녹아내리듯
어쩌면 그렇게 내게 봄이 온다.
수없이 많은 날의 눈물은 목마른 나의 버팀이 되고
슬픔조차 결국엔 추억이 되어
내 맘에 화사한 꽃이 핀다
- 첸 <꽃(Flower)>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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