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o dos tres cuatro!’ (하나둘셋넷!)하면 한 소년의 이야기가 들린다.
언젠가 프랑스에 가보고 싶어 하던 소년, 에어컨 없는 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히던 소년. 곁에 있는 이들의 슬픔을 알아차리고 사회면에 실리는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던 마음이 다정한 소년. 그 소년은 어느새 자라나 유관순을 위한 칸타타를 만든다. 그의 음악은 초라해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다. 때론 세상에서 조연과도 같은 삶을 말하며 길고 긴 시험을 지나는 사람들을 지지해 주었다. 음악만 듣기 위해 주점에 모이던 사람들을 다시 모아 옛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장을 만들어 주는 연주자. 자신의 인생을 곡으로 담는 음악가이자 반도네오니스트 '김종완'.
지난 12월 17일. 고른 숨을 내쉬며 자신의 단어들을 내어 준 그의 작품발표회에 다녀왔다.
그의 존재를 안건,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님과 함께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아람 님의 <해빙기> 공연에서였다. 공연이 끝나고 짐을 챙겨 나가려는 사이사이로 아티스트들과 지인들이 작은 인사들을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작곡가 관상을 한 말간 얼굴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우연은 우연을 다시 불러일으켜 그가 태그된 사진을 보았고, 태그를 따라 그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았다. 정말 놀랍게도 그는 정말 음악을 하고 있었으며, 좋아라 마지 못하는 '반도네온' 악기를 연주하는 반도네오니스트였다. 그가 링크로 걸어둔 유튜브 채널을 타고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영상들이 나온다. 8년 전까지 이어지는 그가 이뤄온 음악 발자취는 용감했다. 그의 음악 스펙트럼은 대단했다. 국악 작곡을 하기도 하고, 미사 탱고란 어마어마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노트라고 할 수 있는 <더보기> 란에도 그는 쉬운 말들을 엮은 몇 문장으로 곡을 설명했다. 소개글을 보는 눈을 재빠르게 거둬 귀로 듣게 했다. 마치 이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듣는 이의 몫이라는 듯.
그의 음악은 맑고 투명해서 듣고 있으면 그가 전해주고자 한 풍경이 고스란히 내 작은 몇 평도 안 되는 방을 가득하게 만들어주었다. 때론 비가 오는 날이면 찾은 <상사몽>은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고, 합창곡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주제가 속 아따맘마 오프닝 노래는 그가 어떤 웃음을 세상에 주고 싶었는지. 마치 <아따맘마>의 오프닝 장면처럼 노을 지는 풍경을 보며 웃음 짓게 했다. 그의 유튜브 채널엔 음악가로서의 성장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의 음악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사가 있었다. 음악을 들을수록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그의 프로그램 노트는 한 문단이라 보기엔 가끔 문장 수가 적었고, 그마저도 자신의 첫 번째 앨범인 <물>에 관한 노트는 세 줄이 채 안 될 때도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 음악을 만들 때, 힘든 일이 있었을까?'
어떤 음악들이 너무 맑을 때면 필시 생각하는 게 있다. 마치 음악가들이 음악을 세상에 내보이는 건 난 '잉태'와 같은 일이라 생각하기에 어떤 음악이 맑고 눈부실 때면 어떤 아픔과 슬픔들이 그를 스쳤을지 생각하곤 했다.
그의 <물>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그랬다. 곡해설이 담긴 노트라고 하기엔 너무 단출해서, 모래사막 한 가운데 부는 바람처럼 그의 마음 어딘가에 바람이 '휑'하고 부는 것은 아닐까라고.
그의 음악들을 듣던 때, 나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음악 싫어'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음악 싫어 기간'이란 내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다. 음악을 듣는 게 너무 슬퍼서 어떤 음악들도 위로가 안 되는 날들을 보내고 있던 때에 그의 음악은 그를 처음 본 공연 <해빙기>처럼 다시 음악을 듣게 해주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다. 그가 연주해 줄 세상이 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발표회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이라도 그의 공연이 열리는 부산행 열차를 타고 싶었다. 허나 내겐 간과하지 못할 현실이 있었다. 나는 초라한 사람이며,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어떤 마음을 더 집중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시 언제 연주될지 모르는 작품들이 발표되는 초연. 무릇 작품발표회는 지인들도 많이 오는 곳임을 알기에, 뻘쭘하게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유튜브로 듣고, 읽어 온 세상이 깨어지는 현실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중에 촬영본이 유튜브에 올라온다는데 그거로 보면 되지 않을까?' '이 돈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지 않을까?' 지인들 사이에서 초라해진 내 모습을 상상하면, '내 행복한 상상들이 깨지면 어떡하지?'란 질문이 들기도 했다.
늘 실제로 듣고 싶다며 팬성 댓글을 자처하며 남겨왔지만,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그의 공연을 이틀 앞두고 깨닫는다. 공연/음악계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의 덕목을.
‘왜 가고 싶었지.’
유튜브에도 올라온다는 데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공연은 시간의 예술이라는데, 나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가?‘ ’멀리서 오는 이들의 설렘과 고통을 잘 알고 있는가?‘ 아비뇽 페스티벌 감독 티아고 로드리게즈가 강연 초반에 말했듯 ‘편하게 영상으로 보면 되는데, 굳이 현장을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묻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스쳐 갔다. 명색이 꿈이 공연/음악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관객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순간의 예술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꿈꿀 자격이 있을까!
앞으로 내가 선택한 길엔 이미 무수히 쌓여온 네트워크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쑥스러워해야 하는 순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지인들 파티일 공연에 가는 것. 네트워크를 위한 파티같은 공연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차분히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좋아하는 음악마다 파이가 적어 그럴 확률이 꽤 높은 음악 공연들을 벌써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시도조차 안 한다면, 나는 나의 꿈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방 안에서 집안일 하느라 하루를 보내고, 한정된 공간들만 오가며 자소서와 이력서 쓰기 바쁜 날들, 그리운 시절을 곱씹다가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시간이 지나가길 마냥 바랄 수만은 없었다.
결심한다. 일요일, 새벽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난다.
‘멀리서 온’, ‘외지인’이란 수식어를 달고 당당히 공연장에 들어서기로 한다. 그런 수식어 없이 내가 갈 수 있는 공연은 얼마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기로 한다.
운이 좋게도 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곧장 왔고,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났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긴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차가운 겨울밤 공기에 시큰거리는 추억들이 몰려왔다. 더 일찍 부산 도착하는 기차 편으로 바꾸고 열차에 올랐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설렘이 커졌다. 예전엔 소음이었을 다른 이들의 기침 소리도 잘 무시할 수 있었다.
후배가 4년 전 추천해 준 <눈이 부시게>란 드라마가 최근 SNS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 엔딩장면'으로 회자하고 있었다. 하루를 몰아 드라마를 보고 후회했다. 드라마를 본 이후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내게 멈춰버린 시간이 가까이 다가와 너무 괴로웠다. 되돌아가고 싶던 어느 8월의 시간, 작년에 두고 온 희망, 바꾸어 전하고 싶은 말들,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란 고민들… ’늙음’이란 기차에 올라타 마주한 나의 빛바랜 얼굴들이 계속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물에 희석시키고 싶어서 지금 기차에 올라탔구나 생각하는 동안 기차는 출발했다.
말똥말똥 바깥의 시간에 호기심을 지닌 눈, 조금씩 감긴 눈, 어느새 조용해진 객실에서 떠진 눈. 종종 걸음같이 있던 밤을 알리는 몇 개의 조명 뿐인 어두운 밤이 지나갔다. 밖엔 서서히 아침이 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걱정했던 것보다 날씨가 좋았다. 기대도 않던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을 봤다. 바다를 바라보던 <눈이 부시게> 속 혜자처럼, <우리들의 블루스>의 모습처럼 ’곱다‘ 생각하며 빛이 내리쬐는 눈부신 풍경들을 지나간다.
부산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동백섬으로 향하다 귓가에 거슬리는 소음을 뒤로 하고 중간에 내려 한참을 걸어 광안리에 도착했다. 이른 윤슬을 배경 삼아 폴짝 뛰며 단체 사진을 찍는 외국인 여행객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어르신들, 강아지에게 빛과 바람을 선물해 주는 반려자들, 저 먼 다리 위로 아침이 왔음을 알리는 듯 빠르게 오가는 버스들과 자동차. 이어폰 없이 걷던 길에서 파도 소리를 들었다.
이리저리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 계획한 일정들을 끝내고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한 시간 쉬기로 한다. 혹시 몰라 챙겨온 여러 렌즈를 바꿔 끼며 무엇이 더 좋을지 고민하는 새 공연장으로 향할 타이머가 울렸다. 길거리의 풍경은 여전히 지루했지만, 5년 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공연 깃발들이 보였다. ‘호두까기 인형을 하는구나…’ ‘짐머만 리사이틀..’ 유명가수의 콘서트 소식들… 부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은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다시 알려주었다.
부산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우연이 필연처럼 느껴지는 혼자만의 오해들을 하며 극장 정면에 서니 부산의 전망이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앞에서 어느 사람들은 쉬고 있을 요일에 부지런히 추운 바람을 이겨내며 바닥을 쓰는 아주머니의 옆모습… 눈에 고이 담아 부산문화회관 챔버홀에 들어섰다.
Inhale (숨을 들이마시다), exhale(내쉬다) - 옥스퍼드 영한사전에서 발췌
“○○○이요….” 티켓 부스에선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으로 된 티켓이 없다 했다. 예매내역도 보여드렸는데, 내 이름이 없다 했다. 좌석을 확인하며 자리를 찾는데, 갑자기 익숙한 사람이 등장했다… 꼭꼭 숨겨놓은 얼굴이 드러나 버려서 부끄러워서 데스크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힐끔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확인을 위해 ”○○○“이란 이름을 다시 한번 말하자, 데스크 직원 옆으로 인터넷으로만 보던, 궁금하던 종완 님이 보였다. 나는 삐뚤어진 광희체처럼 비뚤배뚤하게 인사를 했다. 가까스로 찾아낸 티켓은 정말 우연하게도 중복되어 종완 님의 가까운 지인으로 예약되어 있었고, 다행히(?) 지인분께서 못 오신다 하셔서, 괜찮다는 말을 듣고 공연장 입성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차분히 목도릴 접었다. 노트와 볼펜을 꺼내고, 무겁게 지고 온 카메라 렌즈를 꺼냈다. 커튼콜과 앵콜은 촬영할 수 있다고 해서 챙겨온 렌즈였다. 입장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패딩을 초밥처럼 돌돌 말아 무릎 위에 두고, 재빠르게 촬영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어? 굳이 이 렌즈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었나? ‘할 정도로 무대와 가까웠다. 화이트밸런스를 잡고 색감을 조정하고, 필터도 꼈다 빼며 가장 예쁘게 담을 순간을 기다렸다. 무거운 렌즈를 쓸 때가 있을까 싶었지만, 대포 렌즈 덕분에 연주자의 손과 표정을 담을 수 있었다.
작품발표회라 뭔가 또 지인들만이 와야 하는 공연에 온 것 아닐까 싶어서 약간 쭈글쭈글해졌지만, 신기하게도 함성보단 큰 박수로 호응하는 반응들에 편히 볼 수 있었다.
반도네온 독주로 시작된 공연, 선명한 음향에 너무 놀랐다. 팸플릿에 적힌 반도네온에 대한 설명처럼 필연적 ‘숨’을 동반하는 반도네온의 푸에제(주름상자)는 마치 그가 한 권 한 권 써 내려온 책들이 모인 책장처럼 보였다. 책장은 연주자의 몸짓에 움직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주가 끝나자, 약간은 쑥스러워하며 재미있는 멘트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공연 소개, 곡 소개가 이어졌다. ‘들숨과 날숨’이란 뜻을 가진 공연 제목과 ‘숨을 쉬고 있다는 순간‘에 대한 물음, 꿈꾸던 모습과 선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내고 싶던 사운드와 텍스쳐. 늦게 잠드는 이의 부끄러움이 묻히는 새벽에 짙은 빗물로 촉촉해진 흙에 관한 이야기. 물에 잠긴 후 어느 순간 다가오는 편안함, 어린 시절 나비를 보여 행복해하던 기억과 혼자서 뒤돌아 눕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작은 행동만으로도 박수받던 어린 이야기들. 곡 사이마다 소개해 주시는 종완 님의 이야기는 곡마다 어떤 곡을 들려줄까 하는 궁금증과 설렘을 주었다.
독주 뒤에 이어진 <반도네온 퀸텟을 위한 판타지>. 너무나도 듣고 싶던 곡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는 공연이 ’순간의 예술’임을 느낀다. 악보 위 음표들처럼 초 단위로 지나가는 음들을 붙잡고 싶었다. 오길 너무나도 잘했다. 내가 또 언제 이런 아름다운 음들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출발한 여행길을 토닥이는 것만 같았다.
'김종완'이란 음악가가 지은 곡들은 추운 겨울 밖을 나섰다 돌아온 내 방 이불 속처럼 다정하고 포근했다. 음악가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집'에 관한 이야기처럼. 음악을 왜 들어야 하냔 질문이 들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그가 연주하는 공연장일 것이다. 그의 해설을 따라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저마다 서사가 있었다. 음들의 서사이기도 하고, 작곡가의 배경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가 써 내려간 악보를 따라 연주되는 악기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꾹꾹 눌러 담은 톤들은 곡의 색채감을 더해주었다.
<헉(Gasp)>은 물놀이를 싫어하는 작곡가가 듣고 온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허우적대는 순간의 공포가 있는 물에서 어느 시간이 지나면 편안한 순간이 온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곡이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오가듯 물들이 파동치듯, 피아노는 물결을 표현하듯 몇 개의 건반들로만 반복하는 음들을 연주했다. 이를 이어받아 앞선 피아노처럼 다른 악기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모든 음악의 서곡 연주 전에 맞춰보는 튜닝 음들처럼 연주되는 악기들의 소리는 마치 물속에 담긴 사람들처럼 보였다.
고이지 않은 물은 계속해서 저 먼 장벽을 하이파이브 하고 와서 출렁이는 표면을 보여준다. 물은 계속 이 행위를 반복한다. 반복은 불안하다. 왜 불안할까. 나는 '무엇을 반복하기에' 불안할까. 반복되는 다섯 개의 악기들이 내는 반복되는 소리 속에서 사람을 찾는다. 푸른 바다에 각기 다른 사연들로 헤엄치다 가라앉기도 하는 사람, 벌써 편안함을 찾은 사람, 지금 막 물에 발을 담근 사람.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악기들이 내는 소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헤엄쳤다.
불협화음 같기도, 뾰족한 불안한 음들처럼 느껴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모든 악기가 물속에서 편안함을 찾았는지 잠시 쉬고, 점점 더 톤이 묵직하게 쌓여 간다. 5개의 악기가 한 바닷속에서 저마다 헤엄치다 물에 가라앉고, 빠지는 듯하게 잠식되듯 고요하게 끝났다. 이게 물에서 만난 편안함이었을까?
유튜브로만 들을 수 있었던 미사 탱고 <키리에(Kyrie)> 편곡 <간극>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만화 오프닝과 같이 시작해서 본래 키리에 엘레이숀* 합창 씬으로 돌아왔다. 묘하게 성가 선율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진취적으로 개작하신 것에 유튜브로 미리 듣고 온 종완 님이 가진 역량과 덕질로 쌓으신 감성들이 느껴졌다. 연주마다 까딱이시는 발목이 보였다. 연주자가 즐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춰놓은 긴장감을 맡기기로 한다.
(*키리에 엘레이숀 : 천주교 미사곡으로도 쓰이는 '자비송'이라고도 한다. 라틴어로 표현하면 'Kyrie eleison'이라고도 한다. 한국어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노래이며, 미사곡의 첫 번째 곡이기도 하다. (출처 : 위키백과, "자비송" 참고하여 씀))
보름달이 떴을 때 소원을 빌러 가는 곳이란 뜻의 <달맞이>를 소개하며 곡이 연주되는 동안 소원을 생각해 보시란 소개를 이젠 안 하는 편이라곤 하시는데, 난 소원 빌었다.
이어진 두 곡은 쇼팽의 곡들을 바탕으로 한 <혁명>과 <나비의 꿈>이었다. 두 개의 곡은 꿈꾸는 이상향과 동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원래 피아노를 위해 쓰인 연습곡, 에튀드를 편곡한 반도네온 <혁명(Revolutionary Étude)> 속 바이올린 선율은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마디마디마다 작곡가가 담고 싶었던, 숨겨놓은 단어들을 찾듯 들었다.
<혁명>과 <나비의 꿈>은 재연이었다.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대표로 있는 종완 님이 속한 '친친탱고'는 쇼팽을 가지고 여러 실험적 시도를 해왔다. <혁명>은 지난 7월 19일에 <금정문화회관 수요음악회>를 초연으로, <나비의 꿈>은 11월 <쇼팽, 탱고를 만나다>를 초연으로 올려졌다. 그는 4년 전부터 쇼팽의 여러 곡을 가지고 현악기들을 위한 편곡을 꾸준히 해온 바가 있다.
위 네 개의 편곡된 곡 중 <F. Chopin - Nocturne in C minor Op 48 No 1 for String Quartet>, <F.Chopin - Etude Op 10 no 4 for String Quartet>, <F. Chopin Prelude in E-Minor (op.28 no. 4) for String Quartet> 영상들은 '새로운 시도'이라며 몇 시간 반복 재생 영상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외국인이 있을 정도로 외국 팬들의 정성 어린 댓글들로 가득하다. 마지막 영상엔 두 개의 댓글이 있는데, '음이 안 맞네요.'라고 쓰인 한국인 댓글이 있다. 이번 쇼팽의 편곡들을 들으며 그 댓글이 떠올랐다. '새로운 시도'보다 '어딘가 잘못됐다'고 잘못된 점을 찾아 굳이 남긴 댓글. 당장이라도 '4년이 지난 지금. 이 사람의 쇼팽 편곡은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라고 대댓글을 달고 싶었다.
그는 곡을 소개하며 <혁명>이란 주제를 한 제목에서부터 기대되는 격렬함과 원곡이 가진 왼손의 빠른 음형을 편곡하며 격렬함을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쇼팽이 꿈꿨을 '노스탤지어'를 곡 중간에 삽입, 대비를 주며. 그의 의도처럼 반도네온을 통해 감정적인 부분들을 더욱더 밀도 있게 쌓아갔다.
'여러분은 최근에 나비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란 질문으로 시작된 <나비의 꿈>을 설명하며 작곡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비>의 원곡은 아주 짧은 분량의 곡으로 경쾌하고 가볍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쉬워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였다고 했다. 그가 덧붙인 이야기는 앞선 혁명에서 드러내려 했던 '노스탤지어'와 닮아있었다.
나비를 최근에 본 적 있냔 질문에 객석 곳곳엔 손을 드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정작 작곡가/편곡자는 나비를 본 적이 굉장히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팔랑이며 꽃밭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그의 삶 속에서 더 이상 팔랑이지 않고, 어느새 단어로만 존재하게 됐는지 그의 어린 시절 속에만 존재하는 듯했다. 그때 그 시절이 어린 시절처럼 아득히 느껴지듯 그의 기억 속에서 나비는 많은 것을 떠오르게 했다. 눈앞에 스치듯 지나가는 나비, 봄·여름·가을·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각기 다른 계절의 냄새, 날마다 달라지는 구름의 모양, 사소한 것들로 행복했던 시절. 일어서기만 해도 칭찬 받던, 갓난아기의 분유 냄새가 느껴지는 부모님의 사진첩 속 행복이었을 나, 혼자 뒤집어지는 것만 봐도 행복한 부모의 마음들. 그리고 그 장면마다 있던 자신이었을 행복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주변을 살펴볼 여유없이 달려온 시간 속에서 그의 어린 시절 아무 이유 없이 받았던 박수와 곳곳마다 계절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준 나비의 시간들은 '꿈'처럼 변해있었다.
스스로에게조차 엄격하게 책정한 행복의 기준.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주고받던 시절에 대한 꿈은 그를 다시 과거로 회상케 했고, 그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나비의 꿈>이란 곡을 만들게 했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찰나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던 나비를 매개로 자신과 관객들에게 나비의 숨을 나누어주었다.
그의 곡 설명은 '나비'에 대한 회상을 언급하며 조급한 사회에서 느끼기 어려운 여유로 말했다고 납작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그가 떠올리는 시절과 어린 날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느라 애먼 천장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내게 찾아온 나비의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어준 나비의 숨 때문이다. 그가 들려준 나비의 이야기엔 어쩔 수 없이 지나온 시간과 미련했을지 모를 자신의 부지런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비의 꿈>은 묘하게 익살스러웠고, 아이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나비의 꿈> 다음 곡으론 <그때의 나>란 곡이었다. 이번 그의 작품발표회의 곡 라인업에 관한 설명만 듣고 보면, 그는 현재에서 점점 과거로 헤엄치는 사람의 여행기와도 같았다.
<그때의 나>는 과거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순간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들을 담은 곡이라고 하셔서 과거의 작곡가를 상상하며 들었다.
그에게 절망하거나 후회스러운 순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단편적으로 인스타그램만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정말 쉴 틈 없이 부지런하게만 살아온 사람 같았다. 오랜 연차의 사무국장 생활, 작곡/편곡 활동을 하며 반도네온이란 새로운 악기를 배우고, 다시 또 작곡과 편곡을 하고, 함께할 동료들을 모아 부산을 대표하는 탱고 앙상블을 만들기까지. 그는 언제 숨을 몰아쉬는 걸까. 그래서 이번 그의 작품 발표회 제목이 <들숨/날숨>이었을까.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곁들어 곡을 설명하는 모습에 연주자와 관객들이 같이 웃고 떠들었다. 연주가 시작되고 연주자분들은 눈을 감고 몰입하기 시작했다. 마치 글들로만 쓰인 동화 페이지가 그림이 있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연주가 시작되고 작곡 배경을 떠올리며 '어떤 순간에 절망스러웠을까?' 생각하며 듣기도 했다. 중간에 변곡되는 부분은 미사곡 같기도 해서 작곡가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악보에 (고백하듯이 여리게)라고, 쓰여있을 것만 같았다.
여러 생각들을 쉬어가라는 듯 정류장처럼 들린 마지막 곡, <준비, SET. Vamos!>는 작곡가가 만들고 연주자들이 제시하는 음들을 따라 편안하게 들었다. 신기하게도 평이한 음들이 들릴 땐, 반도네온도 수평이었고, 페르마타(늘임표)처럼 음을 끌어당기듯 연주될 땐 무용에서 몸짓을 보여주며 지연시키듯 한 모습처럼 반도네온도 움직였다.
마지막 곡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악기와 연주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음악은 어쩜 이리 신기할까. 한 공간에 모여있어도 악기들은 저마다의 제자리가 있는데 어떻게 음이 화합하고, 어떻게 음들이 사방으로 퍼질까…
이어진 멤버 소개, 익살스러운 김종완 작곡가님 소개 그리고 기차에 오르기 전부터 생각한 <아디오스 노니노>와 <돛>이 연주됐다. 1시간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시간이 지났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 현장에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지난날들을 후회하고 미련을 두기보다 앞서가고 싶단 욕심 어린 마음이 꿈틀댔다. 새싹과도 같은 용기가 뾱하고 튀어나왔다. 비록 몸은 여기저기 쑤시고, 무거운 가방 탓에 어깨는 무거웠지만,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오곤 내가 벗어나고 싶던 습관처럼 보던 쓸데없는 영상이 보고 싶지 않아졌다.
떠나기 전 나를 침체시킨 ‘늙음’이란 죄악과도 같던 주제는 이제야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 작품발표회를 가기 전에 슬퍼지는 순간이 오려 하면 항상 자연스레 종완 님의 <상사몽>을 떠올리며 낮게 숨죽여 위로받곤 했는데, 이번 공연 이후로 모처럼 머릿속에서 연주되던 곡들의 음역이 높아졌다. 음표들이 계단처럼 적힌 악보가 있다면 악보 속에서 음표들을 디디고 보표의 다섯째 줄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이 오선지 속 마디가 되어 다시 나를, 도돌이표를 마주하게 할지. 크레셴도를 줄지. 마침표가 될 내일이란 마디를 줄진 모르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이 순간에 수식어가 하나도 붙지 않길, 이렇게만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만 웃고, 새싹과도 용기에 물을 주며 살아가고 싶다.
이번 공연을 보며 나는 '김종완'이라는 음악가가 지닌 다정한 곡해설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태도에서 음악가가 지녀야 할 시대의 덕목을 본다.
특히 이번 공연이 특별했던 이유는 지인들이 많이 모였을 <작품발표회>임에도 불구하고, 관람 연령대의 나이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이토록 많은 연령대로부터 지지받는 아티스트는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덕분인지 이번 공연을 통해 어떠한 음악가적 지식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의 풍요로움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간 클래식 장르에 속하는 공연에선 쉽게 들을 수 없는 구성이었다. 물론 <작품발표회>로 지인들이 더 많이 오는 공연이기에 대중성이 조금 더 큰 영역을 차지하고, 410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이라면 작은 공연장이라 할 수 있는 진행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별개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 음악가의 태도가 큰 공연장으로 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청중을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음악가다. 모든 연주자와 음악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모든’ 공연이 이번 공연처럼 진행될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들고 가는 프로그램 북 안에 무슨 내용을 적을지, 관객들이 처음 마주할 예매 상세 페이지에 공연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공연이 끝났을지라도 관객에게 공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으로 시작한 공연은 겸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예술에도 '온도'가 있다면 어떨까요? 가장 따뜻한 예술의 '매너 온도'는 어떤 향유자를 만나야 발생할까요? 예술의 온도를 추측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예술이 낯선 구매자를 만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엘리트나 소수만을 위한 예술은 그 온도를 차갑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순도순 모여 있는 우리 삶 곳곳으로 찾아오는 예술은 온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주 열정적이고 친절한 판매자가 되었기 때문이죠. 예술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공연장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갑니다. 물리적인 조건들, 종종 심리적인 이유로 인해 예술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경만 하는 예술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몸을 직접 부대끼며 체험의 기회까지 제공합니다. 그래서 뜨거운 예술은 문화적 소회를 느끼는 모든 이들의 만족을 채우며 사회적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 월간 <객석> 2023년 12월호 중에서 발췌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될 수 있는 인터뷰조차도 보다 보면 난감해질 때가 많다. 무엇을 수료했는지 명문 학교로 빼곡한 연혁과 수상 이력, 그리고 '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하게 됐나요. 접하게 됐나요'란 흔한 첫 질문은 큰 진입장벽부터 만들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에서 부모님이 듣던 클래식에서 바흐와 베토벤, 슈만과도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고, 가족이 권유한 악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전공하게 했다는 배경에서 나는 음악을 찾지 못한다. 나와는 격이 다른 세상을 본다. 동네 사랑방과 같은 곳에서 대중음악과 트로트를 자연스럽게 들어온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관련 역사가 없으면 접할 수 없는 장르의 예술에 다가서려 하면 음악은 멀어졌다.
몇 년 전, 롯데콘서트홀에서 금난새 지휘자님의 공연을 본 적 있다. 그때 느낀 게 있다. '모든 클래식 공연이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난새 지휘자님은 연주가 시작되기 전마다 곡해설과 음악 속 마디가 어떤 뜻인지 직접 연주자들을 소환하며 음을 들려주고, 곡에 담긴 심상과 이야기를 알려주셨다. 라디오 사연에 당첨되어서 갔던 안인모 님의 해설이 있던 상지 님의 반도네온 공연, 돈이 되는 대로 시간이 되는 대로 갔던 상지 님의 공연에서 상지 님이 들려주신 피아졸라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와 작곡가의 삶 속 이야기는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학부생 시절, 아주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연주자가 직접 해설을 한 공연까지. 많은 공연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청중이 그저 음악만 들으러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케팅처럼 어떤 전략적 설명으로 청중을 설득해야 할 것인지는 음악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본다. 그렇기에 모든 공연이 이런 친절한 해설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클래식화'란 말이 있는 것처럼, 관객이 많이 들어야 하고, 관객이기에 배경을 알고 가야 하는 공연도 있을 테다. 하지만 가끔 공연이 청중과 아티스트들이 같이 만들어 나간다는 공동체적 의식이 옅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접근성은 커진 듯한데, 점점 경제적 소득과 코로나 세대를 지나 물성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이때,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조금 마이너한 장르가 된 듯하다. 나는 유튜브에서부터 실제 공연까지 온오프라인을 오가는 경험을 하며 음악은 단순히 듣는다는 것 이상의 문학적 의미를 지녔음을 알게 됐다. 라디오에서 DJ가 곡을 소개할 때, 특정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대중이란 폭을 지닌 '청취자' 층을 겨냥해 연구하고, 고민해 낸 멘트들로 구성된 아날로그적 글과 멘트들이 공연에 더욱 필요할 때이지 않을까 한다.
이번 김종완의 <IN/EX HALE>의 공연은 음악가로서의 예술의 온도를 표현했던 공연이라 본다. '음악가'의 이야길 듣고 싶어하는 세상 속에서 관객인 '나'일 누군가도, '음악가'도 서로의 책이 되어 세상을 읽어주고 들려주었으면 한다.
앞선 말들 중 소셜 미디어 시대에 아티스트와의 접점이 가까워지고, DM이나 댓글, 공연정보와도 같은 마케팅의 영역까지 두루 섭렵하며 아티스트의 역할이 커져버린 작금에, 아티스트의 서비스가 아티스트의 실력은 당연히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관객과 아티스트가 만나기 어려웠던 시절에 머물지 않고, 그의 음악이 궁금해서 찾아온 이들에게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아티스트의 태도는 공연장에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아티스트들이 그럴 필요는 없을 수 있겠지만, 뮤지컬 <판>의 가사를 빌려 말하고 싶다.
세상에 펼쳐진 여러 이야기.
인생의 사연 속에 다양한 이야기 숨어있어.
앞으로 내가 읽을 책은, 바로 세상에 없는 책.
이 다음에 만날 사람들이 내게 한 권의 책이 되어 주겠지. 살아가며 만나게 될 사람들이 내게 또 한 권의 책이 되겠지.
- 뮤지컬 <판> 중에서
프랑스를 가보고 싶던 마음을 지니고 여름날에 부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던 소년이 어느새 자라나 프랑스에 다녀온 이야기. 돈이 되지 않아 걱정되지만 꿈을 꾸던 '작곡가'란 꿈을 이루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어엿한 음악가가 된 소년의 이야기. 성년이 된 누나에게 전하고 싶던 장미꽃을 마음으로 품고 주었을 장미와 닮은 로자리오의 장미와 같은 길을 걸으며 로자리오를 굴리고 굴리며 꿈을 꾸고, 이루어 온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 음악가 '김종완'을 만나고 왔다.
참 좋은 2023년의 1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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