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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리플렉팅 Mar 07. 2019

누가 감히 문맹 소리를 내었는가? 영화 <칠곡가시나들>

재밌게 나이든다는 것.

80이 넘어도 어무이가 보고싶다. 어무이하고 부르고 싶다.
노인이 되면 지칠 줄 알았는데, 마음엔 지침이 없나 보다.

손수건을 미리 준비해서 다행이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이 줄어들 줄 알았다. 적적함과 외로움에 초연해질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어무이가 보고 싶다는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2019년 2월 21일 목요일. 밖엔 보름달이 크고 노랗게 선명하게 뜬 날이었다.


할머니들은 재능있고 다양한 시선을 지녔다. 여성들만 등장한다고, 노인이라고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영화는 할머니들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사계절이란 풍경과 시간이 자연스럽듯이
 ‘한글’이란 단어로 묶여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록으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보여줄 뿐이다 .
노년의 풍요로움 혹은 외로움, 마을의 이상적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든지 살아가고 있음을 보인다. MC도 없고 일일이 어르신들의 모습을 평가하는 청중도 없다.

 <칠곡가시나들>은 멋지고  사랑스럽다.


'일제강점기 한글 사용 금지' 제법 묵직한 말로 시작한 이 영화는 할머니들의 시장길 모습을 비춘다.  



"글자를 아니까 세상이 더 재밌다."


커피를 나눠 마시는 할머니들의 모습, 간판 읽는 모습. 가까이에 있어 평범하다고 생각한 일상이 할머니들에겐 새롭다. 얼음이 풀려서 흐르는 물 위에 겨울이 간다. 매 시퀀스 사이에 이어지는 사계절의 풍경은 너무 찬란하다.



"가만히 보니까 시가 참 많다. 여기도 시. 저기도 시."


할머니는 동네회관에 모여 매주 한글 수업을 받는다.


누가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속담을 맞추나 하다 보면 급한 마음에 책상을 치기도 하고 손보다 말이 먼저 나가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 손주에게 물어보면 손주는 또박또박 크게 할머니가 잘 읽으실 수 있도록 낱말을 알려준다.


당장에 연필을 어디에다 뒀는지 금방 잊지만, 오늘 배워온 말들을 복습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저마다 배운 것들을 기록하는 방법은 필체만큼이나 다르다. 그림일기처럼 동네에서 본 소를 그리는 할머니의 솜씨는 이중섭이 생각날 정도로 정겹고 탁월하다. 당신의 딸이 사는 동네에 간 할머닌 아파트가 싫다 한다.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 풍요롭지만 심심한 놀이터를 낀 아파트 정자에 앉았다가 미끄럼틀에 올라선 할머닌 동네에 있을 당신의 친구들을 떠올리신다.


방역차가 마을 골목을 지나간다. 동네회관에 수업이 없는 날인가보다. 마을회관엔 할머니들이 모여 고스톱을 친다. 코스모스라 말하지 않아도 가을이 왔나 보다. 눈이 내린다. 봄이 오기 전 명절이 왔나 보다. 목욕탕에 가는 가족의 풍경이 그려진다. 할머니는 손녀가 보고 싶다 한다. 자기 자식의 자식이라서 그럴까. 손녀가 보고 싶다며 할머닌 운다.



"내가 글 쓰는 거 자랑하고 싶다. 고맙읍니다."



할머니의 옷은 오래되었지만 마음은 낡지 않았다. 손자와 손녀에게 용돈을 주고 올라가는 아들네를 배웅하기 위해 할머니는 문을 열고 나온다. 꼭 어둠(그림자)을 뚫고 나오는 모습 같다. 떠나는 모습은 허전하고 쓸쓸하다. 할머니는 이불 갤 때 쓸쓸해 한다. 명절의 쓸쓸함은 오래된 마을 풍경의 공통점인가보다. 마을회관엔 할머니 두 분이 모여 고스돕을 친다. 가족 없는 단출한 삶이 모이면 적적함이 좀 가라앉나 보다.


저녁은 또 다른 새벽빛. 할머니들이 돌아간 집에선 각자의 삶이 또 이어진다.


수업에 안 나오는 할머니를 찾아가 안 나와서 서운하다고 말하는 친구 할머니의 솔직함에 나는 그간 품고 있던 서운하다는 말을 한참이나 생각했다.



"재밌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싶으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기쁨의 날이 오리라. 겨울 엔 눈, 봄에는 나물에 관한 이야기에 봄엔 하늘에서 굶어 죽지 말라고 봄나물을 주나 하며 봄나물을 캐는 할머니. 귀에 꽃을 꼽은 게 참 예삐 뵌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도시의 모습을 속해야만 하는 강박감에 젖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행인 공간에 다니고 나면 집에 오는 길이 너무나 외롭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나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트윗 말처럼 지금 유행하는 것들을 알아둬서 노년에 나눌 이야깃거리를 마련해 놓아야 할까.


나이 듦은 자연스럽고, 노년기의 모습은 청년기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재능있고 다양한 시선을 지녔다. 여성들만 등장한다고, 노인이라고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았다. 여태껏 소비되어 온 프레임을 걷어냈다. 영화는 할머니들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사계절이란 풍경과 시간이 자연스럽듯이 ‘한글’이란 단어로 묶여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록으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보여줄 뿐이다. 노년의 풍요로움 혹은 외로움, 마을의 이상적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모습으로든지 살아가고 있음을 보인다. MC도 없고 일일이 어르신들의 모습을 평가하는 청중도 없다. 난 80이 넘어도 어무이가 보고 싶다는 말에 울며 영화를 보기 전까지도 느꼈던 노인에 대한 억척스러운 이미지를 혐오한 게 한심해 보였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내가 얼마나 나 자신만의 생각과 사랑을 지녔는지 생각했다.


이런저런 마음에 지쳐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정말 오랜만에 스트레칭했다.


바닥이 보였다. 나는 30넘게 이 바닥 위에서 자고 밥을 먹었다. 바닥. 아까 휴대전화 사진첩에 이 집에서 한 돌잔치 사진을 봐서 그런가 참. 바닥을 지긋이 보다 보니 초등학교 때 할머니와 이 방에 누워 있던 기억이 생각났다. 그때 할머니와 나를 덮고 있던 누빔 이불은 정말 컸는데, 이젠 내가 너무 크다.


약 봉투에 할머니는 물어본 적 없는 당신의 이름을 적으셨다. 난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할머니가 부담스러웠었는데. 할머니는 손녀에게 이름을 알려주시고 싶어했나보다.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할머니가 연필로 당신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눌러쓴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니 약속해라. 사람 미워하는데 니 인생을 쓰지말아 이말이다. 한 번 태어난 인생, 이뻐하면서 살기에도 모자란 세상 아닌가.' -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中, 장혜성에게 어춘심여사의 말.


난 그간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미움을 먼저 택했던 것 같다. 미워하는 게 더 쉬웠다. 난 이제 혐오에 지쳤다. 미움에 지쳤다. 쉽게 사랑하진 않겠지만, 성실한 사랑을 배운다. 나의 노년이 허무하지 않았으면 한다. 80이 넘어도 어무이가 보고 싶을 텐데…. 노인이 되면 지칠 줄 알았는데, 마음엔 지침이 없나보다. 오늘 당장 어무이를 안고 어무이 냄새 맡으며 엄마를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언젠간 이 시간이 너무 그리울테다. 별이한테 그랬듯, 숨결 마다 사랑을 말해도 모자란 나날들을 더 사랑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정현종의 <방문객>이란 시처럼, 천상병의 <귀천>처럼, 나의 인생의 모든 날도 모두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참고 견뎌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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