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없는데 어떻게 받아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아라. 씨발○아."
복이 없는데 어떻게 받아요.
너무 긍정적인 사람이라 탈이다. 친절도 하다. 상냥하다. 어쩌면 너무 배려심이 많은 탓인지 모르겠다. 상인에겐 "많이 파세요."란 인사말도 잊지 않는다. 동네 미용실에 들러 머리도 한다. 하루가 꽉 찬 인생을 살아가는데, 질은 낮다. 사회 겉에서 보면 혜경의 인생은 지긋지긋한 것들이 눌어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말을 더 잘 믿는 혜경은 비언어적인 것들에 말한다. "진심이야?" 그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자 애쓰는 혜경은 너무 상냥하다. 여기 나오는 남자들은 혜경에게 거짓을 말할 때 말로 하고, 진실일 때 이미 저지르고 본다. 원래 진심은 말보다 몸이 더 빠르게 배인다.
(준길) "혜경아 나 배신하지마."
(혜경) "배신 안 해"
(준길) "같이 갈 거지?"
(혜경) (고개를 끄덕인다.)
(준길) "그래서 말인데, 돈 좀 마련해 볼 수 없겠니? 한 삼천만 준비해봐. 할 수 있지?"
너가 벌어 이 새끼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혜경은 마련해본단다. 지켜줄 사람 없는데 지켜줄 거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 삶을 지탱하게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왜 그렇게 배려할까. 이런 혜경을 잘 아는 이들은 혜경을 이용하기만 한다. 기다리게만 하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잘 알고, 팔고, 잘 구슬리는 남자들만 달라붙는다. 재곤(김남길 분)이나 준길(박성운 분)도 마찬가지다. 뭐 가끔 진심일 때도 있다. 웃어야 할 것 같은데 웃지 못하겠다. 웃으라고 만든 장면인데 웃지 않더라는 감독의 인터뷰를 봤다. <영화는 수다다>에 나온 오승욱 감독의 유쾌함을 발견 못 했더라면 이 영화, 안 봤을 것 같다. 너무 뻔한 노란장판 감성의 영화는 굳이 시간내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뢰한>은 보다가 이거 시간 엄청 안 가고 있는 거 아냐? 하고 재생바를 탭 하니 30분밖에 안 남은 영화다. 왜 이렇게 <무뢰한>의 시간은 빨리 갈까.
일상적인 것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음악, 연기, 배우
어떤 장면은 꼭 90년대 영화 같다. 뭔가 보이려고 한 장면들 말이다. 재곤이 적색 셔츠를 입고 혜경의 수금 자리에서 민영기(김민재 분)에게 인사하는 장면. 배우 김남길이 한 인터뷰 중에서 <후회하지 않아> 때가 생각나는 영화라 했는데, 내겐 다른 의미로 꼭 그 시대만 담고 있었던 품이 보였다. 하지만 촌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대상화되지 않은 여자를 보여주기 위해 철저한 설정을 갖춘 배우 전도연의 섬세한 연기, 새벽과 파란 색을 잘 잡아낸 색감, 너무 일상적이지만 뻔한 음악 아닌 진중함이 있어 보이도록 한 무게감 있는 OST(조영욱 음악감독)가 있었기 때문에 <무뢰한>은 특별해졌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무뢰한>은 일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천만 원 대의 금액이 오고 갔어야 할 거래가 48만 원에 헛웃음나고, 벤츠나 못해도 BMW로 대우해야 할 것 같은데 국산차로 모시는 것들. 현실감있다. 가끔 어떤 영화는 없는 일상을 평범하게 만드느라 이상할 때도 있는데 <무뢰한>은 너무 동시대에 살고 있어서 무서울 정도다. '누아르'라는 장르로 꾸며내고 있지도 않다. 뭐, 굳이 꾸며냈다면 재곤과 중길의 싸움장면일까. 수컷들의 싸움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는데 너무 잘 다져진 사람들의 싸움 같아 어색했다. 형사니까, 범죄자니까 저렇겠지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게 피곤할 정도로 <무뢰한>은 너무 일기 같다. 재곤이 영업부장으로 들어와 준길이 친구라고 으스대며 "여기 와서 앉아봐."라면서 허세 떠는 장면이 튀어 보여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무뢰한> 속 상황이라면 그럴 것 같으니까.
이 분위기, 마치 사주팔자
준길이 잡힌 후에도 혜경은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살아간다. 재곤은 그런 혜경을 도와주려는 마음 조금과 함께 업적달성을 위해 골목에서 기다리다가 틈 봐서 현장을 덮친다.
"나쁜 새끼."
"잘 들어. 난 형사고. 넌 범죄자 애인이야. 난 내 일을 한 거지. 널 배신한 게 아니야."
"나쁜 새끼…."
혜경은 자신을 속였던 이영준이란 이름을 부르며 재곤을 찌른다. 덮치고 덮친다. '그래. 그렇지. 그대로 보내선 안 되지.'란 바람처럼 혜경과 관객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만일 여기서 혜경이 울거나 갑자기 재곤과 사랑에 빠졌다던가, 재곤이 동정으로 혜경을 도와주었더라면 뻔한 노란장판 감성의 영화와 별 다를 바 없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으이구. 뻔해.'란 말을 끌끌 찼을 테지만, '그랬구나. 그랬어.'라고 캐릭터를 연민하고, 본질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재곤의 사랑을 생각한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아라. 씨발○아."라고 말하는 재곤에게 결국 혜경은 인간 '혜경'보다 술집창녀 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범죄자의 애인을 '잠깐' 사랑하고, 형사란 원칙을 지키는 진심이 있었을 재곤에겐 결국 혜경은 사랑의 을, 죄를 만드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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