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국에 대한 정서를 이해하지 않는 기업. 글로벌기업일까?
일본기업 제품에 일본기념일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로벌기업이라면서 수출국에 대한 정서를 이해하지 않는 것. 과연 글로벌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8년 12월까지만 해도 나는 미도리사에서 나온 다이어리를 좋아했었다. 3년 전쯤 교보 핫트랙스에서 꽤 거금을 주고 산 가죽 다이어리였다. 트래블러스라고 불리는 다이어리다. 가죽과 끈 등으로 속지를 바꿔 낄 수 있었다. 만년필로 써도 비추지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던 내겐 그 모든 것이 좋아보였다. 12월의 스티커 달력을 사기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바쁜 일정에 달력을 볼 일이 많아졌다. 다이어리에 맞는 큰 달력이 필요해서 같은 기업의 스티커 달력을 끼워서 사용했는데, 12월 23일에 천황이라고 보이는 글자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구글링하니 '천황탄생일'이었다. 이전까지는 만년형 속지만 쓰다 보니 몰랐다. 참담했다. 천황폐하 만세란 구호를 억지로 외쳤어야 했던 이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더는 그 위에 어떤 말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내게 인권을 처음 알려주셨던 은사님은 그 시절엔 교과서에 잘 실리지 않았던 일본의 위안부 문제나 문화 잔재들, 언어에 관한 자료를 찾아 깊이있게 알려주셨었다. 그때 보았던 흑백 영상 속 일본군들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어야만 했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죄책감에 화이트로 그 날짜를 지워봐도 다시 그 다이어리를 사용하기 부끄러웠다. 지금 이 땅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달력 위에 적힌 이 날을 울면서 외쳤던 어떤 이들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나는 어릴 적보다 부끄러운 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노트 위에 어떤 다짐을 적을 수 있을까.
사진은 황국 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황국 신민 서사는 1937년 일제가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맹목적으로 외우게 한 일종의 맹세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른바 한국인을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하는 백성으로 동화시키겠다는 '황국 신민화 정책' 혹은 '민족 말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글과 말을 쓰지도 배우지도 못하게 하였고, 우리와 일본이 동일 민족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여 이른바 내선일체, 일선동조 등을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면마다 신사를 짓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우리 민족에게 일본식 성명을 쓰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황국 시민의 서사를 강제로 암송 제창하도록 하였다.
- "황국 신민 서사를 암송하는 학생들",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2019-10-20 방문)
2018년 12월, 역시나 무인양품의 다이어리에도 그 기념일이 있었다. 뒤에 가격과 브랜드명이 적힌 한글이 어색해 보였다. 어디에도 일본제품이니 일본기념일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무인양품의 성공비결을 공부하려고 서점에서 무인양품에 관한 책을 샀던 나였지만, 이후에 무인양품은 더는 좋은 기업이 될 순 없었다. 후쿠시마산 플라스틱 사용 논란이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느꼈다. 이런 기업은 어떤 문제가 생겨도 한국 소비자들을 챙기지 않을 것이 분명할 거라고.
"야. 이거 봐. 여기 천황탄생일 있는 거 아냐? TMI 아니냐?"
"아니. 무인양품은 글로벌기업이라면서 수출하면서 이런 것 하나도 신경을 안 쓴다. 참"
그러게 참. 수출국에 관한 정서를 이해하지 않은 흔적을 보며 부끄러웠다. 이런 곳을 왜 글로벌기업이라고 받들고 있었을까.
인터넷에 천황탄생일에 대한 달력 문제를 찾아봤다. 일본 제품이기 때문에 일본의 기념일을 기준으로 인쇄되어있다고 고지한 곳. 아닌 곳. 2016년도에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다문화가정을 위한 달력에 적힌 천황탄생일 때문에 논란으로 회수되었다는 내용의 기사. 어떤 이들은 '시골 민족주의'라고, 불법은 아니라고 했지만, 과연 그런 정서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왜 항상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더 생각해야 할까. 물론 국제 정서라는 건 그런 감정선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분명한 역사 맥락을 지워버리면서까지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을 문제는 아니다.
최근 논란이 빚어진 유니클로의 광고를 보면서 더욱 느꼈다. 이놈들은 잊지 않았다. 무인양품 어디에도 이 다이어리에 적힌 기념일들은 일본 기념일이 기준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역사를 잊고 소비 할 수 있을까. 잊을 수가 있을까. 일본기업 제품에 일본말, 일본 기념일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 기업이라면서 수출국에 대한 정서를 이해하지 않는 기업. 과연 세계적 기업다운 처사일까? 한국을 지워버리는 기업. 그들의 세계 속엔 한국은 없다.
“일본 브랜드들은 향후 최대한 일본 느낌을 감추는 식으로 마케팅 전략 자체를 바꾸면서 대응할 확률이 높다” -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 "'불매운동'은 이제 일상화.. 유니클로 9월 매출도 작년 4분의 1", 국민일보, 2019.10.20.
혹시나 찾아보실 분들에게
이번년도 달력엔 없습니다. 2019년엔 그쪽나라 그 사람 바뀌어서 공휴일 없고 내년 2020부터 새로운 사람 생일로 공휴일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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