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키의 스낵바
내가 일하는 부서에 조그마한 스낵바가 있다.
작년 가을쯤, 21살의 아가씨가 우리 부서로 들어왔다. 바로 내 앞 데스크에 자리 잡고 일하게 되었다.
스무 살이 갓 넘었지만 너무 앳된 보여 하이스쿨 학생 같다. 작은 키에 말라깽이며 한눈에"아, 예쁘다!"라는 말이 금방 나온다. 고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특이한 건 "흐흣~"하며 약간 낮은 톤의 투명하고 맑은 웃음소리를 수시로 낸다. 한마디로 잘 웃는다.
회사 사장님의 막내딸이다. 닉네임이 Becky인 그녀는 한국말은 거의 못한다. 이미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인턴쉽을 시작한 모델같이 키가 크고 멋쟁이 언니와는 정 반대의 분위기다.
운동화에 너덜너덜한 스웨트나 티셔츠, 청바지가 주로 그녀의 출근복장이다. 때 묻은 커다란 헝겊 가방을 메고 다니며, 눈에 띄는 것이라곤 연초록색 뿔테가 예쁜 선글라스가 유일하게 그녀의 패션 소품이다.
어릴 때도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도 딸 셋 중에 최고의 미모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이 보통 일상의 모습이지만 가끔은 그 기품 있는 얼굴을 가릴 만큼 짙은 화장을 하고 나타난다. 헉! 하며 놀랠정도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무슨 분장사들에 도전장이라도 던진 사람 같다.
베키는 대학을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잠시 휴학을 한 상태였다. 사장님 말씀으로는 막내딸이 사교성이란 없고, 너무 순진해서 혹독한 사회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어렵게 모셔(?) 왔다고 한다. 또래도 있고, 여인천하인 우리 부서가 딱 적격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휴학기간 동안만 일하는 임시직으로 들어왔다. 딱히 정해진 업무가 없다. 그야말로 말단 직원이다. 연약한 몸매에 공주같이 예쁜 아씨가 큰 키에 한 덩치 하는 선배 언니들로 가득 찬 여우 소굴(?)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커피를 타는 일만 빼고 카피를 하고, 공장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등, 사무실의 온갖 잡다한 일을 한다. 심지어는 선배 언니들이 하기 싫은 일까지 떠넘길 때도 "오케이" 한 마디에 일사천리로 일을 끝낸다. 매니저나 동료 직원들이 사장님의 딸이라고 하여 주눅 드는 일도 없고, 특혜를 주는 일도 없다. 신입사원으로 견뎌야 하는 잡다한 일을 자기 사명처럼 해낸다.
상상과 염려 이상으로 일을 척척 너무 잘 해낸다. 내가 사장의 딸이야!라는 거드름 하나 없다. 내가 보기엔 어쩌면 진짜 여우야 말로 베키가 아닌가 싶다.
베키의 처절한 말단 직원의 모습에 사장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한국 부서의 여직원들이 마치 자기 딸을 고문시키는 듯 애석해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오래전부터 베키를 보아온 선배 여사들은 베키가 남 같지가 않아서다.
"어머, 저걸어째, 공주마마(한국부에서는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가 저런 잡다한 일을 해?!, 도대체 저 얘들(동료 여직원)이 생각이 없어!”라고 지나다니면서 모두들 한 마디씩 한다.
베키는 스낵 퀸이다. 워낙 스낵을 좋아해서 그녀의 이름 앞에 붙여진 또 다른 별명이다. 아침 출근 시마다 양손 가득히 맛난 스낵들을 사 가지고 온다. 베키의 아침식사용이기도 하다. 베키가 먹을 보따리를 풀어헤치면 모두들 우르르 몰려들어 순식간에 없어진다. 먹을 것을 보고 다투는 아이들처럼 이것저것 고르느라 난리법석이다. 무엇보다 공짜다!
그 재미가 좋은지 취미를 즐기듯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스낵을 제공한다. 용돈으로 감당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 눈치로는 먹을것 좋아하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인심 좋은 사장님이 뒷돈을 대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스낵을 나누어먹게 되면서, 우리 부서의 깍쟁이 아가씨들은 더 이상 밴딩 머신에서 싸구려 스낵을 사 먹지 않게 됐다. 베키가 자기 데스크의 서랍마다 온갖 종류의 간식거리를 사다 놓고,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오픈했기 때문이다. 일명 "베키의 스낵바"이다
우리 부서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베키의 스낵바가 공짜로 맛난 스낵을 제공하는 작은 매점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서다. 아침뿐만 아니라 오후 세시쯤, 모두가 출출해질 때면 베키의 무료 매점을 찾아오는 직원들이 많아졌다. 팁도 없다. 스낵바에 주인이 없어도 항상 오픈이다. 언제고, 누구든지 맘대로 스낵을 골라 먹을 수 있다.
스낵의 종류들은 초콜릿부터 각종 칩, 쿠키, 껌, 티 종류 등, 브랜드별로 맛나고, 종류도 다양하다. 매번 같은 종류와 값싼 스낵이 있는 회사의 밴딩 머신은 더 이상 인기가 없어졌다. 좀 더 가격이 비싸고 맛있는 스낵들이 많은 베키의 스낵바는 우리 회사의 최고의 밴딩 머신이 되었다.
직원들은 여기에서 공짜 간식을 수시로 얻어간다. 작은 간식거리를 손에 쥐고 가는 그들은 팁 대신 , 행복에 겨운미소를 놓고 간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감사"의 말도 함께. 매일매일 이 작은 스낵바에서 값없이 치러지는 작은 베풂으로 즐거움들이 흘러넘친다. 일할 맛이 난다.
그녀는 매번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의 스낵바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사람들이 그녀의 스낵바를 이용해 줄 때 제일 행복하다. 이러한 베풂 덕에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스낵바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친구가 생겼다. 스낵바 덕택에 여우 같은 선배들을 따돌리고 베키는 단숨에 회사의 스타로 떠올랐다.
매일 아침, 모두가 그녀를 만나는 순간, 그녀의 웃음소리가 있다.
거기에 즐거움의 공간-베키의 스낵바도 있다.
그녀의 주변을 싸고도는 행복의 미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녀가 내 앞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 좋다. 나도 덩달아 그 행복의 기운들을 듬뿍 받는것 같다.
"으흣~"
그녀의 특이한 웃음과 함께 베키의 스낵바가 오픈된다.
하루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