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할머니가 어때서요!
"그것 알아요?
호호, 지나도 나이 들면 Angry Grandma가 될 소질이 다분히 있다는 거요?”
어느 날, 무슨 일로 잔뜩 상기된 나를 향해 우리 부서의 쥴리아가 던진 말이다.
"응? Angry Grandma라고? 정확히, 무슨 의미야?라고 내가 물었다.
"앵그리 할머니요? 좋게는 뭐든지 당당하게 자기주장(고집)을 펼치지만, 아니다 싶은 거면
싫은 소리도 버럭 잘 해대고요, 난 늙었다고! 이건 아냐! 거슬리면 너희들이 알아서 비켜가!
뭐 이런 식이죠.. 호호호~"라고 쥴리아가 말했다.
어느 정도 참다가, 이건 아냐! 하는 일에는 대충 넘어가지 않고 문제를 제기해서 개선하고야
말겠다는 나의 의지가 평소에 너무 돋보였나? 해서, 미래의 앵그리 할머니상이라고?
훗훗 , 앵그리 할머니.. 귀엽군. 솔직히 난 그 말이 전혀 싫지 않았다.
"사실~ 저의 엄마가 앵그리 할머니상이에요!"라고 쥴리아가 말했다.
마치 탐정이 은밀히 감추어진 비밀 하나를 들추어내듯 그녀는 자기 엄마에게 비친 앵그리 할머니의
잔상들의 한 부분을 살짝 들쳐 내 보였다.
쥴리아는 엄마가 한국인으로, Drop off (세탁물을 받아서 공장으로 보내고, 옷 수선도 하는 작은 세탁소)를 혼자 운영하신다. 그야말로 직원이자, 사장님이시다.
가령, 세탁물을 하나만 가져오는 손님에게는 대놓고 "세탁물 하나는 드라이클리닝 안 합니다!(시간 들이고
돈도 안돼서)"라고 매몰차게 거절한다.
"예? 이러면 당신 가게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을 텐데요?"라고 손님이 맞선다.
"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저기 건너편 가게로 가세요~"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게다가 이것저것 까다롭거나 얄궂은 손님에게는 " 이런 요구는 좀 성가셔요, 손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가게를 한번 찾아보세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는 것이다.
대신, 세탁물을 많이 가져오는 손님들에겐 각별하고, 혹 옷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기꺼이 보상을 해준다.
최근 옷일 경우에는 온 백화점을 뒤져서라도 똑같은 옷을 사 준다는 것이다. 돈 되고 질? 좋은
최상의 고객만 선별하여 최고의 대우로 손님을 모신다는 방침이다. 그래도 세탁소는 건재하다.
남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싫고 좋고가 확실하다.
하긴 미국에서는 개인경영의 스몰 비즈니스의 경우, 유독 상식 이하로 까다로운 고객을 사절하는 방식이
상당히 직선적일 때가 많다 "예~ 이건 곤란한데요, 다른 가게로 가 보십시오!"라는 식으로..
까다로운 고객에게는 굳이 시간 들이고 힘든 서비스를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쥴리아는 뭐든지 한 단계 걸러내는 "필터" 기능이 없는 이런 엄마의 모습이 마치 "앵그리
할머니"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엄마의 앵그리 할머니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앵그리 할머니상이 다행인 점도 있다. 쥴리아가 어렸을 때 아빠랑 헤어졌던 엄마는 유독 왜소한
체격으로 쥴리아를 데리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지금까지 혼자 살면서도 스스로 잘 버
티며 씩씩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순전히 "앵그리 할머니"의 깡다구 같은 힘으로.
앵그리 할머니란 내가 생각하기에, 그냥 "성깔을 부리는 못된 할머니"가 아니다.
"나이 들어서까지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돼! 그렇게 살만치 살았거든!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안 살아도 괜찮아!" "난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바른말을 할 뿐이라고!"
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교적이며, 두리번거리듯 어정쩡한 사고방식대로 살지 않으며 또한 독립적이다. 그야말로 자기 색깔이 분명한 " 카리스마가 있는 할머니"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도 앵그리 할머니들이 꽤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콘도 1층에 있는 애나 할머니다.
그녀는 홀로 살고 있으며, 첫눈에 보아도 그야말로 웃는 얼굴의 인자한 할머니상이다. 어느 때라도 마주치면
"Hi Gina~" 하며 반가운 미소로 정답게 인사를 한다.
애나 할머니는 콘도 앞의 작은 땅을 일구어 예쁜 꽃들을 가꾸는 일에 언제나 바쁘다. 그녀가 정성스레 가꾼 정원의 꽃들은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3층에 살고 있는 내가 베란다에서 꽃에 물을 주느라 행여 1층까지 조금이라도 물이 튕겨 나가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큰 발소리를 내며 올라온다. "지나! 1층으로 물이 떨어져 난데없이 물 사례를 받았단 말이야! " "나는 항상 저녁에는 바깥에 나와 내내 호수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아침에 물 주라고!" 하며 물 주는 시간까지 알려주며 호통치고 내려간다. "음.. 어째서 이 할머닌 내가 물 주는 시간에만 거기 나와 있는지.." 결국 아침에 꽃에 물을 주게 되었다. 3층에 사는 내가 양보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다 보니 서늘한 아침에 물을 주는 일도 더욱 선명한 꽃들과 마주하는 것 같아 그 시간이 나름 좋아졌다.
미국에는 이렇듯 동네마다 은퇴한 "앵그리 할머니들이" 반드시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 부유하고, 오랫동안 그 동네의 터줏대감처럼 수십 년간을 자기 앞마당처럼 애착을 가지고 동네를 지켜보며 지내온 할머니들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은근한 텃새가 가미된 앵그리 할머니상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메일이 조금만 늦어도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난리치고 호통친다. 동네 우체국의 대부분의 성가신 전화
문의들이 빗발치는 것도 이들의 자질구레한 불만이나 부탁 때문이다. 미국에서 우체국은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기에. 그러고 보면 앵그리 할머니들은 우체국의 귀한 고객인셈이다. 이들 때문에 동네 우체국이 제대로 운영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서비스 개선도 앵그리 할머니들의 호통 소리 때문이라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리는 말이다.
혹, 옆집 잔디가 깍지 않은 채 며칠이고 지나서 숲처럼 무성해지면 당장 동네 분위기 망친다며 야단이 난다.
(참고로, 미국은 주택의 잔디가 깍지 않은 채 무성하게 방치되면 주민이 신고할 수도 있다) 게다가 집값 또한 떨어진다고.
모두들 집 관리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듯 앵그리 할머니들은 동네 반장 노릇까지 한다.
마켓에서는 여러수십 장의 할인쿠폰을 가져와 기나긴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꾸깃꾸깃 접어둔 쿠폰을 한 장씩 들이대며 할인받기에 바쁘다. 50센트라도 절약하기 위해 직원과 옥신각신 거래를 하느라 사투?를 벌일 지경이다.(소박한 옷차림이지만, 대개가 큰집을 소유한 부유한 할머니들이다) 손님들의 기나긴 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 중요한 거래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줘요~오케이?" 뭐 이런 눈치다.
모으기도 귀찮고 , 행여 모아두면 기간이 지나가 버려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는 쿠폰들이다. 적어도 지금 나에겐. 그래도 미국 사람들은 나름 "경로자 우대"라는 선심을 쓰는 것으로 "음, 할인쿠폰으로 치열한 삶을 사시는
구만" 하는 식으로 앵그리 할머니에 대한 용납은 그저 눈 감아주듯 관대하고 자연스럽다.
이렇듯 앵그리 할머니들이 동네에 많이 살면 짜증 날 일도 있고, 성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도둑에 대한 안전? 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온종일 집에 거주하면서 앞. 뒤 잔디를 관리하고 , 그러면서 앞집, 뒷집, 옆집까지 망을 봐주는 역할을 확실히 해준다. 뭔가 수상한 사람이 동네에 접근이라도 하면 당장 911에 전화해서 경찰이 달려오게 한다. 동네의 시큐리티 역할도 훌륭히 수행한다! 그런 동네에는 도둑도 어떻게 알고서 들지 않는다는 게 후문이다. 앵그리 할머니들 덕택이다!
그런 점에선, 내가 사는 콘도역시 안전지대다. 콘도 바로 맞은편에는 아래 위층으로 키와 덩치로 보아 뭔지 분위기부터가 심상찮은 무서운 할머니들이 사시고, 우리 집 일층에는 다름 아닌 애나 할머니가 거주한다. 그녀는 매일 부엌 창문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고마운 일이다!
밤. 낮으로 지역 경찰차가 콘도 건물 전체를 순회하지만, 나는 항상 애나 할머니가 일층에 있다는 것이 더 안심이 된다.
앵그리 할머니들은 무슨 일이든 막 화내고 그래서 그냥 미운 할머니들이 아니다. 당당하고, 씩씩하게 할 말하며, 눈치 보지 않고 사는 할머니들이다. 커피 필터처럼 잘 걸러내지는 못해서 성깔 있게 보이기도 하고 이것저것
관여하고 잔소리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생을 가르치는 스승 같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에 어깨를 들썩이듯 , 스스로에게 음, 잘하고 있어! 라고 격려하며, 건강하게 열심히 산다.
결코 밉지 않은 우리들의 강한 할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며 엄마의 얼굴이기도 하다.
조용히 살고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고 그저 연약한 듯 온화한 할머니로 살건가, 아니면 성깔도
부리면서 남에게 당장 미움받을 소리도 좀 하고 큰 소리 탕탕 내는, 싫고 좋고 가 분명한 쿨한 할머니가 좋은가?
근거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기주장이 확실히 있는 "앵그리 할머니"상이 건강하게 오래 살 것 같다는 확신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다.
쥴리아의 말대로, 나도 앵그리 할머니의 모습으로 늙고 싶다. 누가 뭐 래든.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