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일하는 미국 여성들
"죠이셜린! 은퇴 언제 할 거야? "
머리를 세게 흔들며 "으음, 아직은 아니라고~ 집에 있으면 재미가 없어, 따분해서 곧 죽을 거야! 직장에 나오면 사람들 만나지.. 살맛이 난다고! 호호호"
며칠 전 온 회사가 떠들썩하게 그녀의 생일 케이크를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넌지시 그녀에게 던진 말이다.
죠이셜린은 우리 회사의 직원 중 73세의 최고령자이며 전문적인 고객담당 매니저다. 다리가 불편한 그녀는 집 근처에 사는 직원이 직장까지 모셔오는 유일한 직원이다. 우리 회사에서만 일한 경력이 30년, 회사의 대표적인 왕마담이시다. 사장님과는 모자지간처럼 격의도 없고 서로 싫은 소리도 버럭 질러 댈 정도로 허물이 없다. 그러고도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로 웃으며 "굿모닝~" 하며 인사를 나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내온 전우애로 다져진 우정이다. 모든 직원들이 죠이셜린 할머니를 모르면 회사 생활하는 게 불편해질 정도로 그 위상은 뛰어나다. 그러한 대우가 그녀의 직장생활을 재미있고 활기롭게 만드는데 한몫을 하는 건 사실이다.
죠이셜린은 20대 초반부터 일을 시작했고 아내, 엄마, 직장인으로서 거의 50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으니
"평생 일"이란 말이 맞다. 그녀에겐 삶이란 일이고 일속에 삶이 묻어있다.
미국에서 여성들은 누구나 일한다.
나 역시 미국에 와서 결혼하자마자 "얘야~미국에서는 누구나 일한다, 미국을 알려면 일 하는 것이 좋단다~"라는 시댁 어른들의 은근한 권유(?)에 밀려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집에 있어보니, 대낮에 온 동네에는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간 듯 조용했고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사람을 만나려면 직장을 가야 되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는 평생 일 해야 하는 것이 무슨 옥살이를 해야 하는 것처럼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서 이제 나도 직장생활 경력 20년이 넘었다.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19살의 어린 나이에서부터 거의 대부분의 미국 여성들은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하면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아이를 Baby Sitter 또는 Day Care Center에 맡기고서라도 다시 직장으로 복귀한다. 회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출산휴가는 3개월 (남편은 2개월 기준)이다. 이들은 출산 후에도 당당하게 회사로 출근하며 회사 역시 이들을 환영한다.
이렇게 해서 여성들은 커리어우먼으로서 경력을 계속해서 쌓아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보통 미국 여성들의 삶이다.
직장인, 엄마, 아내, 딸, 자매, 친구로서 그 역할이야말로 엄청나다. 그야말로 슈퍼 워킹우먼이다.
미국의 여성들 중에 일 하지 않는 여성들은 주로 배우자가 변호사 (그것도 유능한 변호사일 경우다)나 의사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통계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의사 남편을 둔 부인도 오피스에 나와 일을 돕는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소수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을 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고 낮에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사실 따분한 일이다.
내가 아는 교회 집사님 한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남편이 변호사도, 의사도 아닌 경력이 오래된 연방 공무원이다. "집에서 놀려니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없어!"라고 은근히 자랑처럼 불평을 늘어놓았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바보상자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학교 식당에서 점심준비를 돕는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오래전 일이다.
한때는 (일하기가 힘들었을 때)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분이기도 하다. 그렇다. 평일날 한낮에 거리나 샤핑몰로 외출을 해보면 주로 노인들만 보일뿐 일을 할만한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란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젊은 여성들은 대기업에 취업을 하는 반면, 중. 장년의 여성들의 취업 분포는 미국 내 웬만한 중소기업 회사의 대부분을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시청 직원과 같은 시 공무원, 관공서, 백화점, 항공사 직원, 식품점 등 모두 40-60대 여성들의 엄청난 파워를 보이고 있는 일터들이다.
미국에서 중. 장년의 여성들이 대부분의 일자리에서 유리한 입지와 파워력을 가지는 이유는 미국은 법적으로 정해진 은퇴연령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회사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강제로 은퇴를 시킬 수 없다.
물론 은퇴연금이 주어지는 합법적인 연령인 62세부터는 자진해서 은퇴를 시작할 수 있다.
여성들의 취업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연령보다 "경력"을 중요시 여긴다는 점이다.
많은 경력을 가진 중. 장년의 여성들은 20대의 젊은 여성들 못지않게 취업률이 높다.
특히 백화점이나 항공사 직원, 스튜어디스들 모두가 중, 장년의 여성들이 활개치고 일하는 곳들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도 40-60대의 연령의 여성들이 회사 전체에 차지하는 비율이 85% 정도다.
은퇴가 가까워진 한국부의 매니저급 여직원들 또한 대개가 직장생활 20-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민 와서 결혼하고 힘들게 자녀들을 양육하면서도 일을 놓지 않았던 억척스러운 여성들이다.
미국에서는 " 모든 여성들이 일한다"라는 문화에 함께 걸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너무 바쁜 일상을 살아가지만 단지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 외에 직장이란 삶 속에서 인생의 많은
가치를 배운다고 말한다.
죠이셜린은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마치 꿈을 품은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를 띠며 그녀가 지금의 나이까지 일을 즐기며 사는 재미에 대한 팁 (조언)들을 열변을 토하며 늘어놓았다. 그녀가 일을 떠날 수 없는 이유들이다.
또한 그녀가 말하는 여성들이 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배우고, 독립적이게 되며, 가족을 지원한다, 자신의 재량이 향상된다,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의 롤 모델이 된다, 삶의 다양한 스킬을 터득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지원(도움)할 수 있는 가치를
배운다, 시간과 돈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러므로 남자(남편)를 존중하게 된다.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며,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일을 함으로 자신의 라이프(취미나 꿈)를 가질 수 있고, 또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나도 은행에 근무했을 당시 10년간을 극성스러운 고객들에 시달리고 사람들에 떠밀리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냈다. 수십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들을 달래면서 직장을 다니다 결국 어느 날 사표를 내던졌다.
3개월간을 쉬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함께 놀 사람도 없고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지루해져서 일을 또다시 갖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들어간 직장이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곳이다.
나는 자녀가 없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수월하고 여유 있는 직장생활을 해 왔지만 미국이란 사회 역시 나에게도 만만치 않게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다.
일이라는 노동의 대가는 "돈"이라는 것을 손에 쥐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많은 가치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것은 계속해서 연결되어 내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해와 관용, 존중과 베풂, 돈의 가치"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는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있는 것 들이다.
이제 나는 좀 힘들어도 "그놈의 직장 그만두고 싶어!"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꿈(글쓰기)을 좀 더 단장하고 잘 가꾸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일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평생 일은 힘든 수고와 함께 그만큼 나에게 많은 삶의 가치들을 가르쳐줄 것이 분명하기에.
어느 날 사장님께서 여직원들이 식사하고 있는 식당에 나타나셨다.
보통 땐 60이 넘은 선배 언니들에게 "할미꽃"이라고 놀려대시지만 오랫동안 회사와 함께 지내온 여직원들에겐
각별하시다. 그가 빙긋 웃으시면서 던진 한마디,
"할미꽃 언니들~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해줘요! 은퇴들 하시면 하와이 여행시켜드릴게요~"
이 한마디에, 할미꽃 여사님들은 "와~ 회사 다닐만하네~" 하며 무척 좋아들 한다. 정말 일 할 맛 난다고!
나도 하와이 여행 꼭 가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