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책 읽기- 발트 3국(1)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나니.
언젠가 두보가 쓴 저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종이를 동그랗게 구기면 주름과 부피가 생기듯 허파꽈리처럼 나와 이 세계의 접촉면이 늘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그새 나의 봄이 조금 변했음을 느낀다. 우리의 봄이, 봄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질감이, 그 계절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봄에서 여름으로 영영 건너가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열림원, 251쪽)
라트비아 리가에서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가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다가,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친구들과 함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9일 동안 둘러보았다. 사실 러시아는 여행 우선 순위에 없었지만 친구들이 가자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러시아 여행.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까지 둘러보고 싶었다. 함께 하는 친구들 가운데 두 분은 50대를 넘은 나이라 아무래도 무리이지 싶었다. 영화에서 수 없이 보았던 붉은 광장을 보니 신기했다. 보고 싶어서 애가 닳았던 다른 나라 여행지와는 달리, 차분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 했고,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무언가를 물어보면 친절했다. 소문대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깊고 빨랐고 내부가 호텔처럼 아주 화려했다. 러시아식 꼬치구이라는 샤슬릭은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고, 추운 날씨에도(여름인데도!) 옷을 차려 입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본 볼쇼이 발레도 멋졌다.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면, 수도원 묘지에서 차이코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 무덤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으로 기회를 넘겼다.
셋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여행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2014년 동유럽 여행 이후로 처음이다. 원래는 남아공 친구와 에스토니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사정이 생겨서 오지 못했다. 아주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 그래서 여행 가방에 책 다섯 권을 넣어갔다. 김애란 작가의 책은 에스토니아부터 조금씩 읽었는데 리가에서 빌뉴스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마지막까지 다 읽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손으로 자꾸 훔쳐냈다. 봄에서 여름으로 영영 건너가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혼자 하는 여행은 생각이 많아진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길을 걸을 때, 까페에서 쉴 때, 숙소에 들어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전까지 끊임없이 안을 들여다본다. 그게 좋을 때도, 안 좋을 때도 있다. 지나치게 안을 들여다보면 여행하는 중인데 우울해지기 쉽다. 사진으로만 봤던 건물이, 실제로 눈 앞에서 봤을 때 어떤 모양과 색인지, 그 뒤로 내려앉는 노을이 아름다워서 내뱉는 감탄을 혼자서만 삼킬 때는 혼자인 게 아쉽다. 아쉽지만, 아름다움은 오롯이 내 몫이다. 적당히 파고들면,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추억을 만든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날. 친구들은 밤 11시 비행기고 나는 아침 버스라 인사를 나누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달리는 내내 바깥에는 끝없는 밀밭이 펼쳐진다. 유럽은 스위스, 알프스를 빼고는 정말 평평한 땅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여름이라지만 상당히 추운날씨라서 길가에 핀 보라색, 노란색 꽃들이 왠지 대견해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으로 가는 버스는 러시아 국경에서 한 번, 에스토니아 국경에서 한 번 선다. 2014년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 기차 안에서 여권 검사를 받았는데, 그때는 기차 안으로 두 나라 경찰이 들어왔던 기억이다. 버스는 두 나라에 공평하게 한 번씩 서는구나. 러시아 국경에 서니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버스에 실어두었던 여행가방도 다 꺼내서 출국심사를 받는다. 괜히 두근두근하는 심장. 여권에 팡, 도장이 찍히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몇 미터 갔을까? 버스가 다시 서더니 이번에는 입국심사. 여행가방을 꺼내 여권을 보여주니, 으레 하는 질문을 한다. 왜 왔느냐, 얼마나 있다 가느냐,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보여 달라, 탈린에서는 어디에서 묵느냐. 비행기 티켓은 종이로 가지고 있어서 보여주었는데 마지막 질문에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탈린 숙소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재빨리 손전화를 꺼내 탈린 숙소에서 보낸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온통 한글로 되어있는-예약하는 누리집이 알아서 한글로 바꾸어 보낸- 이메일을 한참을 보더니 여권에 입국도장을 찍어준다. 휴우. 러시아에서 유심칩을 해두길 잘했구나. 데이터가 없었다면 탈린 숙소에 대해 말할 수 없었겠지.
이렇게 국경에서 한 시간 반을 보내고 탈린에 닿으니 오후 4시 쯤. 버스만 6시간 정도 탔다. 작지만 오렌지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버스터미널을 나와 트램을 타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탈린 구시가지 입구에 있는 ‘타비노야’라는 호스텔이다. 길 찾는 게 어렵지 않아 좋았다. 일본사람이 주인인 모양으로 ‘たびのや’라 붓글씨로 쓰여 있다. 구시가지 건물이라 그런지 아주 낡았지만 사람 손때가 묻고, 청소를 날마다 깨끗하게 해서 지내기에 괜찮았다. 방은 2층 침대가 두 개 들어가는 아주 작은 방. 나, 일본에서 혼자 온-유럽여행이 처음이라는, 더구나 탈린에만 머물다 가는-열일곱살 여자아이, 이름을 모르는 서양 여자 둘. 같은 동양사람이라 쉽게 말을 틀 수 있었다. 이름은 미나세. 혼자 유럽여행을 오려고 돈을 모으고 엄마와 한 판 싸우고 용감하게 왔단다. 엄마가 하는 여행은 돈 낭비라고, 그런 건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며, 작은 여행가방 하나 들고 왔단다.
호스텔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2층으로 삐걱대며 올라가는 불편함도 반갑다. 호스텔 스텝도 친근하고 부엌 겸 거실 노릇을 하는 공간에서는 다른 여행자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반가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름을 주고 받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 내가 사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갈 곳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 시간들. 오후 다섯시 쯤 탈린 구시가지를 보러 나섰다. 자세한 정보 없이 온 터라 호스텔 스텝 다리오에게 지도를 받아들고 숙소 바로 뒤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숙소 바로 뒤 언덕에는 정부청사와 다른 나라 대사관이 몰려있다. 러시아에서 깜빡 잊고 보내지 못한 엽서를 쓸 우체국도 찾아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걷다보니 탈린 구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코차투오 전망대에 닿았다. 중세시대 건물들, 붉은색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저녁 풍경. 혼자 온 사람이 나 뿐이라 괜시리 쓸쓸했지만 다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러시아에서부터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아 뜨끈한 수프를 저녁으로 먹고 숙소에 들어와 혼자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