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랑 Aug 27. 2020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여행하며 책 읽기-발트 3국(2)



다음날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러시아에서 빼 먹은 엽서를 쓰려고 우체국으로 갔다. 오래된, 하지만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정갈한 느낌의 우체국에 앉아서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언젠가 당신도 이곳에 와서 나에게 엽서를 보내달라고. 창문으로 부서지는 아침볕을 받으며 엽서를 쓰니 저 밑에서부터 은은한 행복이 차올랐다.


우체국을 나와서는 발길 닿는 대로 구시가지를 돌아다녔다. 지도는 필요 없다. 이곳 저곳, 골목 골목 걸어 다니기. 서두르지 않아도 좋으니까. 걷다가 힘들면 잠시 숙소에 들어와서 쉬기도 했다. 구시가지가 워낙 작은데다 숙소가 가까우니 쉬어갈 수 있다.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까페 –어쩌면 에스토니아 전체에서도-에 갔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 1층이 붐벼서 2층으로 올라가니 구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발코니처럼 꾸민 테이블이 보였다. 동양 사람 셋이 앉아 있었는데 날 보자마자 얼른 손짓을 하며 여기 앉으란다. 감사하다고 웃으며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니 다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삼키는게 보인다. 자리에 앉으니 기분이 좋다. 열린 창문 바깥으로는 탈린 구시가지와 사람들이 내려다보인다. 따뜻한 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작은 유리병에 바나나 조각과 함께 얼그레이 커스타드가 들어 간 디저트를 숟가락으로 한 입 먹는 순간, 행복함에 절로 포뇨를 흉내 냈다.-‘언덕 위의 포뇨’라는 애니메이션에서 포뇨가 꿀물을 처음 마시고 맛있어서 얼굴을 감싸는 모습.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페리 타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덟시 페리를 타고 핀란드 헬싱키로 넘어갔다. 페리는 두시간 반 정도 걸려 헬싱키에 닿았다. 다른 나라에 도착했으니 여권검사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입구를 빠져나갔다. 여권에 스탬프를 받고 싶었는데 아쉽다. ‘카모메 식당’으로 만난 핀란드는 뭔가 깨끗한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본 핀란드는, 생각보다 더러웠다. 길거리에 담배꽁초나 쓰레기가 많았고, 낮부터 술에 취한 채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영화나 사진에서 재단한 이미지만 생각하고 내 멋대로 핀란드에 대해 상상해버렸다. 




페리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바로 헬싱키 대성당이 보인다. 헬싱키 대성당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도서관도 구경했다. 헬싱키에 와서 보고 싶었던 것은 독특한 건축물. 깜삐역에 있는 나무로 지은 방주 모양의 작은 교회, 돌을 쌓아 만든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를 봤다. 깜삐 교회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면 순식간에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물 속으로 들어갈 때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였지만 서로의 숨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조용히 지냈다. 버스를 타고 시벨리우스 조형물에 갔다가 근처에 ‘레가타’라는 작은 까페에서 인생 시나몬롤을 먹었다. 계피 냄새가 아주 강한 빵인데 설탕 덩어리를 툭툭 얹어서 구워 커피와 잘 어울렸다. 다시 중심가로 돌아와 헬싱키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 따뜻한 저녁볕을 받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다. 핀란드가 더 추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오랜만에 여름에 가까운, 따뜻한 날씨, 햇볕이었다. 밤 12시 가까이에 숙소에 도착, 조용히 씻고 쓰러지듯 잤다. 이날 걸음수는 30,000보. 

작가의 이전글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