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책 읽기-발트3국(3)
다음날도 천천히 탈린 신시가지를 둘러보고, 그 다음날 버스를 타고 라트비아로 갔다. 탈린에서는 비가 안 내렸는데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 오니 비가 많이 내린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비가 내리면 살짝 내리다 말았는데, 리가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발트 3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서 도시의 색이 조금 어두운 편인데 비가 내리니 더 어두워 보였다. 우산을 펴고 여행가방을 끌고 트램을 타고 꽤 많은 정거장을 지나 숙소로 찾아갔다. 찾아가는 법을 잘 설명해주어서 무사히 도착했다. 비가 내리니 나가서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었다. 조금 쉬다가 가벼운 차림으로 트램을 타고 터미널 쪽으로 가서 가볍게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리가는 터미널에서 구시가지가 무척 가까워서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할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게으름을 피워서 11시 넘어서야 숙소에서 나왔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걱정이었는데 아침 나절에 비가 안 와서 기쁜 마음으로 나섰는데! 우르릉 꽝꽝 천둥번개가 치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구시가지를 둘러보려던 생각을 바꾸어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으로 트램을 타고 갔다. 몇 년 전에 새로 만든 도서관으로 라트비아의 옛이야기인 ‘얼음산’을 본따 만들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엇갈려서 바로 보인다. 그 너머로 기울어진 유리 보관함에 장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서 멋지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면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맨 꼭대기에는 어린이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 문을 잠그고 안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기웃거리는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어 살짝 구경했다. 시원한 창문 너머로 다우가바 강과 리가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구경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에서 라트비아 작가와 화가 스무명이 ‘말’을 주제로 짧은 이야기 글을 묶어낸 〈The Horse〉라는 책도 샀다. 도서관 너머 구시가지로 건너는 다리를 슬렁슬렁 걸어서 어제 비가 내려 제대로 못 본 도시를 구경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은 미술관과 작은 운하를 둘러보고 첫날부터 눈여겨보았던 판화 공방에 들렀다. 안으로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며 20유로를 내면 판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두꺼운 종이에 원하는 그림을 그린 다음 뭉툭한 송곳 같은 것으로 그림을 따라 그린다. 그 다음 판화 잉크를 바른 다음 판화를 찍을 종이를 덮은 뒤 프레스기에 넣고 커다란 바퀴를 손잡이 삼아 프레스기를 돌린다. 다 돌린 종이를 살짝 떼어내면 짜잔! 귀여운 새 한 마리가 나타난다. 두꺼운 종이에 다른 색을 발라 모두 다섯 장을 찍어냈다. 하나씩 찍어낼 때마다 그림물감과는 다른 발색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마음에 쏙 드는 체험을 마지막으로 다음날은 라트비아에서 리투아니아로 떠났다.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빌뉴스다. 빌뉴스도 다른 두 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도이지만 아주 작은 도시다. 두 나라의 수도에 견주어 더 낡은 느낌이 나는 도시로, 구시가지에 유대인 게토였던 건물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아가니 내 여행 경력 가운데 가장 허름하고 낡은, 무섭기까지 한 건물이다. 소련 시절에 지은 듯한 건물인데, 계단도 낡아서 부서지고, 아파트 복도 한 쪽으로는 공동 화장실과 빨래터가 있는데 영화에 나올 법한 공간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얼른 숙소에 들어가-다행히 숙소는 깔끔했다- 문을 잠그고 그 날은 숙소에서만 머물렀다.
다음날 빌뉴스 구시가지를 둘러보러 걸어가는데 뜬금없이 동상이 보인다.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인데,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뭐지?’하고 고개를 숙여 살피니 ‘Romain Gary’라고 써 있다. ‘뭐?! 로맹 가리?’ 기억을 더듬어 보니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 같긴 한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 식당에서 와이파이를 잡아서 검색해보니 맞다. 옛 러시아의 영토인 ‘빌나’, 지금의 빌뉴스에서 태어나 열네 살 무렵까지 살았단다. 세상에. 〈자기 앞의 생〉의 작가가 태어난 곳이라니. 어제까지 그렇게 무서웠던 빌뉴스가 갑자기 너무나 사랑스럽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안주 삼아 리투아니아의 전통 만두인 키비나이를 먹고, 아까 지나쳤던 ‘작가의 벽’을 다시 찾았다. 뭔지 몰랐는데 검색해보니 리투아니아의 작가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벽에 만들어 두었단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 벽면에 A4 종이 크기를 넘지 않게 만든 조형물들이 숫자와 함께 붙어있다. 벽 한 켠에는 숫자와 작가의 이름을 정리해두었다. 아무래도 로맹 가리도 있을 것 같아, 살짝 취한 얼굴로 찾아보니 22번이다. 두 개의 톱니바퀴에 에펠탑과 비행기, 작은 마을을 그려 넣었다.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벅찬 감정이 차오른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가 태어난 곳에 내가 왔구나. 미리 알았더라면 책이라도 들고 올 것을. 덕분에 행복한 마음으로 리투아니아 여행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스크바 공항에서 환승대기 시간이 여섯 시간 남짓이다. 다행히 살짝 누울 수 있는 의자가 곳곳에 있어서 편하게 쉬었다. 앉아서 책도 읽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펄쩍 펄쩍 점프를 뛰는 달봉이(우리집개)를 안아주니 그제야 온 세상을 떠돌던 마음이 가만히 내려앉는다.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이라, 처음에는 낯설었다. 바로 어제까지 친구들과 복작대었던 터라 더 그랬다. 그래도 반나절이 지나자 어느새 익숙한 감각에 젖어들었다. 혼자라는 외로움.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풍경,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지 못해 속으로 삼키게 된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무언가 서늘한 것이 스며들어와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는데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콕 찝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았다.
허공에 옅게 퍼지는 마을 종소리는 언제나 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아마 내게 종소리가 오래전부터 어떤 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로 몸에 새겨져 그런 듯하다. 집 앞의 학교 종은 어릴 때 내가 반복해 들은 종소리와 같은 음으로 운다. 단 여덟 개의 음표로 단조롭고 나른하게, 반음 플랫된 상태로 운다. 기진맥진한 권투 선수가 다시 링에 올라야 할 때 울리는 ‘땡’소리처럼 단도직입적인게 아니라 체조 선수가 허공에 풀어놓은 리본처럼 운다. 마치 ‘시간’이 아닌 ‘시간의 테두리’를 흔들어 보여주듯. 그래서인지 아무 때고 학교 종과 무방비로 만나면 내 안에 애써 고정해놓은 어떤 울타리가 넘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여러 가지 것들이 넘어온다.
그렇게 밀려오는 것 안에 정확히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정인 것도 같고 감각인 듯도 하고 정서 또는 기억인가도 싶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는 건 그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뭔가가 내 안에 마련해주는 ‘빈 공간’이다. 들어와 자리를 ‘채우거나’, ‘차지하는’게 아닌 ‘자리 자체’를 만들어주는. 고요하고, 고유한 상태를 독려해주는 무엇. 그 기분이 익숙해 내가 이걸 언제 느껴봤더라 고민했더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문장들. 좋은 문장들을 읽었을 때.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열림원, 139-140쪽)
이거였구나. 서늘함, 쓸쓸한 느낌이 마음 어느 곳에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거였구나. 마음 한 켠에 자리를 만들어 슬그머니 들어와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것. 이 느낌 때문에 자꾸 여행을 가게 된다. 고요함이 들어차는 순간을 또 느끼고 싶어서 가는구나. 내 앞에 기다릴,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여행과 그 순간들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행복하게 살아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