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랑 Sep 01. 2020

계속해보겠습니다

강철같은 명랑성,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켠다. 오늘은 맑은데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니 빨래부터 해야지. 얼마 없는 빨래거리지만 해가 날 때 빨아서 말려야한다. 한 시간 반. 빨래가 돌아가는 시간. 우유에 씨리얼을 말아 먹고, 약을 챙긴다. 혈당강하제와 프로폴리스 두 알. 꼬박꼬박 챙기는 약은 잘 먹는데, 건강보조제는 정말 먹기 싫다. 비타민, 루테인 같은 약을 안 먹었는데, 몇 달째 기침이 떨어지지 않자 선생님이 프로폴리스를 사서 안겨주셨다. 이걸 먹어서 나아졌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기침은 여전해서 보건소에 가서 결핵 검사도 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천식 검사도 했다. 천식이라기엔 애매하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천식 약과 흡입기를 처방받았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기침이 시작되고 쉽게 잦아들 것 같지 않을 때, 흡입기를 두 번 들이마시면 쉽게 잠들 수 있다. 천식이 아니라는데 천식 약이 잘 듣는다. 


빨래가 끝나기 전에 집 청소를 해야지.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새로 산 수납함에 넣는다. 너저분하게 늘어놨던 약, 고지서 따위를 눈에 안 보이게 넣어놓으니 식탁이 깔끔하다. 먼지가 쌓여서 걸레를 빨아 닦았다. 내친 김에 텔레비전, 책장 여기 저기 먼지를 닦아낸다. 손이 자주 닿아서 얼룩진 냉장고를 닦다가 문득, 냉장고 위를 한 번도 닦지 않은 걸 알아챘다. 의자 위에 올라서 보니 4년 넘게 쌓인 먼지가 새까맣다. 한 번에 깨끗하게 닦이지 않아, 몇 번이고 문질러 먼지를 훔쳐내면서 ‘나이가 들면 냉장고 위에 먼지는 어쩔 수 없이 두어야겠지? 의자 위에 올라서서 닦는 일은 할 수 없을 거야.’ 생각했다. 


요즘, 자주, 나이 들었을 때를 생각한다. 그려본다. 아마, 혼자 살게 되어서 더 자주 그려보는 것 같다. 동생이 결혼을 했고, 달봉이를 데리고 신혼집으로 간 지 이제 삼 주 째. 결혼식 일주일 전에 신혼집에 갔고,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는 닷새 동안 달봉이를 내게 맡겼다가 도로 데려갔다. 내내 마음을 먹고 있긴 했지만, 역시 허전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바로 밖으로 나가 만 걸음을 걷는다. 씻고 책을 읽거나 동영상을 보고 나서 잠이 든다. 허전함을 느낄 때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다. 언제나 등을 꼭 붙이고 자던, 잠에서 깨어나는 기척을 느끼면 누구보다 반갑게 아침 인사를 했던 달봉이가 없으니 쓸쓸하다.


혼자 살겠다고, 2년 전부터 마음을 먹었고, 동생이 결혼하고 나서는 더욱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 외로움은 혼자 사는 선택에 따라오는 거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하는 결혼식. 오랜만에 뵙는 친척 어른들은 하나 같이 

“너도 얼른 결혼해야지.”로 인사를 했다. 

“저는 혼자 살려고요.” 하면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래, 요즘은 뭐 혼자 살아도 되지.” 하거나 

“그래도 결혼을 해야지 부모님이 마음을 놓지.” 한다. 왜 혼자 살면 안 되는걸까. 얼마든지 스스로를 챙기며 잘 살아가는데 왜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남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을 안 하면 뭔가 모자란 것처럼 보는 눈길도 너무 싫다. 결혼을 한다 해도 어차피 나이 들면 냉장고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지 못하는 건 같지 않나? 음. 모르겠다.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잘 마른 빨래를 걷어서 갠다. 옷장에 넣고 어제, 오늘 먹은 그릇을 씻는다. 걸레를 손으로 빨아서 널자 빨래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탁탁 털어서 건조대에 널고 마지막으로 청소기로 한 번 더 거실 바닥을 민다. 휴우.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며 시계를 보니 두 시간 동안 청소를 했다. 엊그제 만든 할라피뇨 장아찌를 주려고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얼굴을 보며 전화를 하는데, 오후에 계곡으로 놀러 간다고, 가기 전에 서둘러 달봉이 산책을 시켰단다. 동생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혼자 지내기 괜찮아?” 이런 질문 잘 안 하는 성격인데, 꽤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지? 

“응. 저녁에는 뭐 하다 자서 괜찮은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깐 허전하지.” 석연찮은 얼굴로-내 말을 못 믿겠다는-

“아빠가 저번에 너 보고 나서 얼굴이 어둡다고 그랬어. 엄마도 그러더라.” 한다. 

“내 얼굴이 어둡다고?” 허허, 웃어버렸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 보이는 거겠지.” 

“몰라, 엄마랑 아빠랑 너 엄청 걱정해.” 

“나를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셋이 지내다가 둘이 한꺼번에 나오니까 아무래도 걱정이 되겠지.” 

“같이 있을 때도 너는 밖에 나가서 늦게 들어왔고 뭐, 달봉이가 없어서 허전하긴 하지만 나는 나름 잘 지내는데.” 

이번주 월요일부터 춤을 배우러 학원을 다닌다고, 새 가구를 샀다고, 아침에 식탁 정리를 이렇게 했다고, 보여주었다. 나는 잘 지낸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에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하니 좋아하신다. 청소가 고되었는지 눈이 감겨서 잠시 누웠다가 엄마 집으로 갔다. 시골에 자리 잡은 까페로 가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내 얼굴이 어둡다고 그랬다며?” 

“어.” 

“뭘 그렇게 걱정을 해? 아무래도 걱정할 게 없어서 나를 걱정하는거지? 내가 열아홉, 스무살도 아니고, 내년이면 마흔인데 뭘 걱정해?” 

“부모는 팔십이 되어도 자식 걱정하는거야.” 

“…….” 

그럼 내 걱정은 내가 결혼을 해도, 하지 않아도 같다는 말이구나. 내가 혼자 살아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식이라서 걱정하는 거라면 왜 부모님은 결혼이 답이라고 생각하는걸까. 내가 부모가 아니라서 그 마음은 영원히 모르겠지. 커피를 다 마시고 엄마를 시장에 내려드리고 책을 읽으러 단골 까페에 갔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엄마와 만나지 않고 바로 책을 읽을 참이었다. 집을 나서며 들고 나온 책은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디디의 우산>이 마음에 들었기에 학교 도서관에서 황정은, 이름을 보고 주말에 읽으려고 가져왔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소라, 나나, 나기의 이야기. 소라와 나나는 한 살 터울 자매. 소라가 열 살일 때 공장에서 일하다가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인 애자와 반지하 방으로 이사 갔을 때 만난 옆집 아이가 나기. 옆집, 이라고 부르지만 두 집 사이에 벽 하나를 둔, 방 같은, 한 손을 벽에 짚고 빙글 돌면 옆집 방이 들여다보이는, 알 수 없는 구조. 서로에게 ‘도깨비야?’ ‘여기에 도깨비가 있어?’를 묻던 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함께다. 이름 그대로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쳤던 어머니 애자는 남편 김금주를 잃고 조용히, 천천히 죽고 또 죽었다. 그런 어머니 옆에서 소라와 나나는 스스로를 돌보며 키웠다. 먹을 것이 없어 쉰 떡을 밥솥에 데워먹던 날, 옆집 나기 어머니인 순자가 밥을 챙겨준다. 과일가게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죽어버리고 억척스럽게 과일 장사를 하던 순자는 아무리 피곤해도 다음날 아침에 어김없이 신발장 위에 나나, 나기, 소라 몫의 도시락을 얹어두었다.      




정말 맛있었지.

특별하게 화려한 반찬도 없었는데.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순자씨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더니 연륜, 이라고 대답했다. 나이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단순하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런 연륜,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43쪽)     



어느 날, 소라는 꿈에서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단풍잎을 본다. 아, 태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떠오른 사람이 나나. 나나가 임신했을 수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선뜻 물어보지 못하다가 출근하다 물어본 말에 ‘응, 지금 병원 가 볼 건데 같이 갈래?’ 선선히 답하는 나나를 따라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되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애자는 없는 게 좋다, 가엾어서,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어서 없는 게 좋다, 라고 심정의 영역에서 회로가 꼬여 있는 소라.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45쪽)   



병원에서 들은 아기 심장 소리는 쿵쿵쿵, 두근두근이 아니라 쐐, 쐐, 쐐 하는 힘찬 소리였다. 그 소리에 사로잡힌 소라는 어쩌면 나나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나나와 아기를 지킬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무섭지 않아? 하고 소라가 묻습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영향을 주고 그 아이가 뭔가로 자라가는 것을 남은 평생 지켜봐야 한다는 거 …… 무섭지 않아? 하고 말입니다. 나나는 무섭지. 아직은 실감이고 뭐고 부족하지만, 무서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모르니까 무섭다고 느끼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무섭더라도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어. 각오하고 있어. 각오가 필요할 정도, 라고 생각하면 조금 비장해지지만 그래도 각오하고 있어. 실은 얼마큼 각오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도대체 뭘 각오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라서 자신감 같은 것과 더불어 호흡마저 희박해지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각오하고 있어 그래도 나름,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중략)

이런 이유로 낳겠다고 결심한 거면 너무 무책임한 걸까.

하지만 생각했어.

이렇게 열심히 꿈을 보내올 정도로 태어나고 싶은 아이로구나, 하고.

(123쪽)     



삶은 고통이라고, 산다는 건 고통이라고,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징징댔다. 혼자 남는 것, 늙어간다는 것, 애자의 말을 빌리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세계를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 모두가 자초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 필멸 뿐인 세계에서,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그밖엔 즐거움도 의미도 없이 즐겁다거나 의미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죽어갈 뿐인데. 어느 쪽이든 죽고 나면 그뿐일 뿐인데.’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소리 내어 웃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227쪽)  



책을 다 읽자마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까페를 나섰다. 차로 걸어가는 길에 눈물이 마스크 사이로 흘렀고 차에 타자마자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다. 몇 년 동안 사로잡혀 있던 생각을 정리해주는 듯한 소설. 삶이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때때로 숨을 몰아쉬던 내게, 아니라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앞날이 무서워서 징징댔다. 어쩌면 이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알 수 없는 힘이 이끌어 준 것이겠지.


자그자그자그, 동생의 몸 속에서 자라나는 조카의 심장소리를, 

얼마전에 주욱, 하고 배를 밀어냈다는 조카의 자그마한 손을, 

기다린다. 


엉엉 울고 난 얼굴을 손으로 쓱 훔치고,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고, 만 걸음을 걷고, 깨끗하게 씻고, 머리를 말린 다음, 빗으로 머리가죽을 통통 두드리며, 

“머리야 자라나라, 모발, 모발.” 주문을 외운다.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2020.7.18.)

작가의 이전글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