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처럼 쏟아져 내리는 위로
"끝이 있을까?”
“끝이 오겠지?”
둘 중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마지막 책 《노르망디의 연》을 읽고 있는데 보건소에서 문자가 왔다. ‘검사결과 음성’. 2주 동안 검사만 세 번이다. 어머니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어.”
전화를 받자마자, 이미 내가 할 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편안한, 당당함마저 느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런 어머니가, 통화가 끝날 때 쯤 던진 저 질문에서, 머뭇거림과 불안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울컥했다.
“그럼, 언제나 끝은 오지.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어.”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울어버렸다.
동료의 확진으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마지막 접촉일을 기준으로 헤아려 11월 15일부터 자가격리에 들어가서 24일에 격리가 끝났다. 주말에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터라, 열흘 동안의 자가격리가 ‘너무’ 힘들지는 않았다. 끝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 기다림이라 견디기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집에만 잘 있어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컸다.
아이폰 알람을 끄고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는다. 잊을까봐 얼른 자가격리 앱을 켜고 증상을 확인한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노트북을 켠다. 이메일로 업무 보고를 하고 온라인 수업 준비를 한다. 급하게 원격수업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교과서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교과서 없이 할 수 있는 수업으로 4차시 분량의 수업을 준비해야 한다. 자료를 찾고 파워포인트를 만드는데 곧 11시. Zoom으로 회의를 한다. 기획팀과 학년부장 선생님들과 하는 회의. 영상으로 회의를 하면 항상 피곤하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답을 해야 해서 그렇다. 한 시간 남짓 회의를 하면 점심 먹을 시간. 간단히, 때로는 제대로 차려서 점심을 먹고 아침 설거지까지 하고 자리에 앉으면 한 시가 훌쩍 넘는다. 다시 수업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덧 세 시. 세시에는 기획팀만 Zoom으로 만난다.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지만, 그래도 회의는 회의. 회의가 끝난 뒤 한 시간이 지나면 이메일로 업무종료 보고를 보낸다. 만들던 파워포인트는 반도 못 끝냈다. 이내 저녁 준비를 해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소화를 시키며 30분 남짓 라디오를 듣는다. 저녁에도 자가격리 앱으로 증상을 확인해야 한다. 유튜브에서 홈 트레이닝 영상을 찾아 한 시간 동안 따라 한다. 깨끗이 씻고 머리까지 말리고 나면 피곤함이 몰려온다. 밤 열 시가 채 되기 전에 잠이 든다.
자가격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부러 전화를 한 친구들은
“푹 쉬어. 쉬는 김에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책도 읽어.” 라는 말을 꼭 했다. 영화는커녕, 책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드는 날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 적은 대로 하루살이를 쭉 읊어주면 우리의 통화는 “와아……, 힘내.” 라는 말로 끝을 맺곤 했다. 열흘 동안 어머니는 만두를 빚어서 문 밖에 두고 가셨고, 동생은 풍선처럼 불러 온 배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까페의 원두를 사다 주었다. ‘집 밥만 먹으면 질리니까 배달 음식도 먹으라’며 치킨을 배달시켜 준 선생님도 있다. 볼 수 없어도, 만나지 못해도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이어진 느낌이 들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하루 하루, 아침부터 오후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해가 이우는 것을 보는 날들. 낮게 저물어가는 겨울 햇살이 유독 길게 거실로 미끄러져 들어오면,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벽과 벽지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일하는 책상으로 삼았던 부엌 식탁에 앉아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거울 속의 거울)’을 들으며 멍하니 그런 울퉁불퉁함을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버텼지만, 때때로 멍해졌다. 하릴없이 거실과 부엌을, 길지 않은 거리를 빙글빙글, 끊임없이 걷곤 했다.
23일 월요일 아침,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자가격리가 끝나기 전,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일주일 넘게 세워 두었던 차. 워셔액을 뿌리니 새까만 먼지가 옆으로 밀려난다. 집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 흥이 났다. 쌀쌀한 보건소 앞마당에서 검사 순서를 기다리는데 자꾸만 발장단을 맞춘다. 코 안으로 쑤욱 들어오는 기다란 면봉 같은 것. 검사를 받은 사람들은 너무 아팠다며, 다시는 받고 싶지 않다고 호들갑이었지만, 독감 검사와 다를 바가 없다. 받고 나면 코가 조금 더 오래, 찌잉, 하다는 것만 빼고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검사를 마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일 오후 12시면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꼬리를 물고 ‘그래도 혹시…그러면 어쩌지?’하는 물음이 뒤따랐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되뇌는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와 《노르망디의 연》을 집어 들었다. 50쪽 남짓 읽고 멈춘 책. 다시 출근하기 전에 책 한권은 읽고 싶었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마지막 책.
《노르망디의 연》은 1930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시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다. 로맹 가리의 소설은 언제나 사랑이야기. 1차 세계대전에서 부모를 여의고 삼촌과 살고 있는 주인공 뤼도(뤼도비크)는 어느 날 평생의 사랑, 릴라를 만난다. 릴라는 폴란드 귀족 집안의 딸. 여름이면 이곳에 있는 별장에 온다. 열 살 때 숲 속에서 꿈결처럼 잠깐 본 소녀를 뤼도는 4년 동안 매일 같은 장소에서 기다린다. 한 번 보거나 들은 건 잊지 못하는 기억력과 남다른 상상력을 타고 난 뤼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4년 뒤, 다시 만난 둘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 또 다른 세계대전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 둘의 곁에는 뤼도의 삼촌이자 프랑스 연 만들기 장인인 앙부아르즈 플뢰리, 삼촌의 친구이자 프랑스 음식을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마르슬랭 뒤프라, 릴라를 찾아 파리로 간 뤼도를 도와주었던 유대인 포주 쥘리 에스피노자, 독일군 사령관이지만 프랑스 요리를 몰래 배우는 폰 틸러 장군……,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등장인물들이 빼곡하다.
뤼도의 삼촌인 앙부아르즈 플뢰리는 집배원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 온 뒤, 연을 만들어 날리는 데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 없고, 날리지 못하는 연도 없다. 동네 아이들을 위해 연을 만들고 날리는 사람. 전쟁이 끝나갈 때 쯤-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때- 프랑스의 유대인을 독일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까지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인의 별 모양, 노란색 연 일곱 개를 날리는 부분을 읽었을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지스탕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연을 높게 날리지 못하게 하고, 때때로 작업실과 헛간을 마구 뒤졌던 나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유대인의 상징을 하늘로 날려 보낸 삼촌.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릴라의 가족이 살았던 폴란드 집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뤼도는 계속해서 릴라의 소식을 묻고 다닌다. 그런 뤼도를 보며 쥘리 에스피노자를 비롯한 어른들은 ‘차라리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건넨다.
뤼도비크 플뢰리, 너를 위해 내가 걱정하는 오직 한 가지는 말이야... 두 사람의 재회야. 어쩌면 그때쯤 난 이미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실망할 일을 면제 받게 될지도 모르지. 프랑스를 되찾게 될 때면 우리의 상상력도 많이 필요할테고 공상도 많이 필요할거야. 네가 3년 동안 그토록 열렬히 줄곧 상상해온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되면……. 온 힘을 다해 계속 그 아가씨를 만들어내야 할 거야. 틀림없이 네가 알았던 여자와는 아주 다를 테니까……. 프랑스의 경이로운 귀환을 꿈꾸는 우리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훗날 종종 꺼림직한 웃음으로 실망감을 드러내게 될 거야. 저마다 다른 정도의 실망감을…….(274쪽)
뤼도와 릴라는 다시 만나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한복판을 살아낸다. 뤼도가 3년 동안 상상으로, 그의 곁에 살려놓았던 릴라는, 살아남아 다시 만난 릴라는, 그러나 뤼도의 기억 속에서 살았던 사람과 달랐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 속을 여자의 몸으로 지나올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각자의 상처를 그대로 지닌 채, 전쟁을 헤쳐 나온 두 사람은, 다시 삶을 일구어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더 잘 말할 수 없기에.’
삶을 사랑하는 인물들로 가득했던 그의 소설과는 달리,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권총 자살로 삶을 끝낸다. 그가 남긴 짧은 쪽지.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 답은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 ‘밤은 고요하리라’와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구절 ‘더 잘 말할 수 없기에’라는 말에서 찾기 바란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자가격리가 힘들어서였는지,
마침내 끝나서였는지,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였는지,
로맹 가리의 삶이 떠올라서였는지,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들이 생각나서였는지,
뤼도처럼, 세계대전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코로나로 잃은 것들을 우리 기억 속에서 기억해내고,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해서인지,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게 서러웠는지.
과연 끝이 있기나 한 건지, 당당하고 담대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불안에 떨게 한 이 모든 것에 끝이 오긴 하는지.
그래,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서 그렇게 긴 울음을 울었다. 그리고 내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삶을 이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뿐.
과거에 대한 미련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지금을 살아갈 뿐.
힘차게 땅을 딛고 걷자.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저녁에 저무는 해가 남긴 노을을 보자.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별을 찾아보고,
내가 살아내야 할,
상상으로라도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들을 품고 살자.
(2020.12.02. 마침내 첫 조카, 별이가 세상에 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을 뿐. 두 눈을 꼭 감고, 새근새근 잠에 빠진 조카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만나보면서-코로나 때문에 조리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두려움 없이 지금을 살아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