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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랑 Aug 25. 202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여행하며 책읽기-뉴질랜드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허블, 2019). 뉴질랜드 여행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자꾸만 입 안에서 책 이름을 굴려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마음에 남아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코로나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자주 입 안에서 책 이름이 맴돈다. 잠들기 전에도 하릴없이 뇌까리고, 운전을 하면서도 떠올리고 제목을 불러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정리를 해야한다. 마음에 이리저리 널리고 쌓인 글감, 생각들을 한데 모아 엮어내야한다. 그래야 자꾸만 곱씹어 보는 책 이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다. 이제는 아무도 들르지 않는, 텅 빈 우주대합실에서 만난 안나라는 할머니. 안나는 항성 간 우주여행을 위해 ‘딥프리징’이라는 인체 동결 수면 연구를 하던 과학자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슬랜포니아 행성계로 이주시키고, 연구를 마무리한 뒤 함께하려던 계획은, 항성 사이를 손쉽게 이동 할 수 있는 웜홀이 발견되면서 틀어진다. ‘딥프리징’기술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에서 슬랜포니아로 가는 마지막 우주비행선이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는 안나. 발표를 마치고 급하게 정류장으로 가지만 이미 마지막 비행선은 출발해버렸다. 그 뒤로 정류장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딥프리징’해 가면서 슬랜포니아 행성계로 떠날 날만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181쪽)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2쪽)    

 





안나를 말리러 온 ‘남자’는 결국 안나가 낡은 우주선을 타고, 결코 닿지 못할 그 곳으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빛의 속도는커녕,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부서질 것만 같은 우주선을 타고, 가족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두운 우주로 나가는 안나의 마음.



이 이야기가 이토록 내 마음에 남은 까닭이 무엇일까.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 때문일까? 요즘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하는 외로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서 더 마음에 남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한다는 건,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한다는 건……. 


여행을 좋아해서 방학마다 집을 비우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긴 하지만, 주말에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도 잘 지내는 편이다. 혼자 책 읽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밥 잘 먹는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날이 길어지면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 밖으로 나가서 들로, 산으로 쏘다니고 싶다. 혼자 지내는 외로움과는 결이 다른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격리로 인한 외로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더니, 사회적 동물이란 뜻에는,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진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거구나. 가족, 동무들이 나와 함께 서로 삶의 무게를 나누어졌기 때문에, 지금, 혼자, 오롯이 내 삶의 무게를, 일상을 견뎌내는 것이 힘든 거구나. 스스로를 돌보며 얼마든지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구나.


몸의 부재.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는 것. 반가운 마음에 얼싸 안고 싶은데 안을 수 없는 것. 손을 잡을 수 없는 것. 가볍게 어깨를 토닥일 수 없는 것. 없는 것, 없는 것, 없는 것,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들. 


BC와 AC. Before Corona와 After Corona.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은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말이 들린다. 한국은 새롭게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열 명 아래로 줄어들면서 한숨 돌린 모양이지만, 전세계는 아직도 어마어마한 확진자와 사망자가 쏟아져나온다. 미국 사망자가 4만 명이 넘었다. 이탈리아와 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도 썩 좋지 않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있다면 과연 지금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 무섭고 두려울 것 같다. 


더 이상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 질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잦아드는 것 같지만 겨울에 다시 대유행을 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그렇지만 단호하게 예측을 내놓았다. 코로나19는 과거에 경험했던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계열인 사스나 메르스와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 무증상 감염과 이로 인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점, 코로나19의 유전자 돌연변이가 벌써 4300개나 된다는 점, 그래서 더 백신 개발이 어렵다는 점, 알맞은 치료제를 찾을 수 없다는 점. 길게 잡고 기다리면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어내겠지? 아니, 앞날은 알 수 없는 거잖아. 이르면 가을부터 코로나가 엄청나게 유행한다는데, 그러면 학교는 어떻게 하지? 5월이나 6월에 겨우 등교개학을 했는데 가을에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내 삶은 어떻게 바뀌는거지? 생각할수록 두려움이 덮친다.


교무실에서 BC와 AC를 말했더니 올해 새로 교무실 기획팀에 들어온 선생님이

“교무실은 딱히 작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한다. 다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마터면 눈물도 불쑥 나올 뻔했다. 가슴이 부풀어오를 정도로 웃고 나니 걱정이 잦아들었다. 행복했다. 아이들이 올 수 없는, 텅 빈 듯한 학교에서, 자꾸만 미루어지는 개학과 그 소식을 공문이 아닌 티비뉴스로 보는 답답함과, 공문이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계획을 세웠다가 다시 엎었다가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쳐갔다. 한 사람으로서 겪어내야 할 불안, 두려움과 교사로서 책임져야 할 일들이 뒤섞이며 다들 날카로워질 법 한데도, 서로를 다독이며 학교에 출근하던 날들. 추운 겨울을 지나자마자 딱딱한 땅 속에서 힘차게 푸른 잎을 밀어내는 보리처럼, 꿋꿋하고 씩씩한 보리처럼, 선생님들은 곁에서 함께하는 것만으로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더 자주 떠들고, 함께 한바탕 웃었다. ‘작년과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는 말. 우리가 여전히 함께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것. 코로나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고래를 봤다. 카이코우라에서 배를 타고 20분 넘게 향유고래가 나오는 먼 바다로 나갔다. 배의 엔진을 끄고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둘러본 지 2분 정도 지났을 때, 눈 앞에 불쑥 향유고래의 등이 솟아올랐다. 힘차게 내뿜는 날숨. 파도를 닮은 등지느러미가 바다를 가르며 헤엄친다. 우리는 배를 몰아 천천히 향유고래를 따랐다. 향유고래는 한 시간에 한 번, 숨을 쉬러 바다 위로 올라온다. 10분 정도 숨을 내쉬며 헤엄치던 고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자맥질을 한다. 힘차게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으면 꼬리가 철썩, 파도를 때리며 물 위로 솟았다가 들어가는데 이때가 카이코우라, 향유고래를 대표하는 순간이다. 


고래가 물 위로 나왔을 때 가슴이 벅차올라 그만 울어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눈물이라 흐르는 대로 두었다. 고래의 꼬리가 물 위로 솟아올랐을 때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두근거렸다. 바다 속으로 사라진 물 위엔 동그랗게 흔적이 남았다. 물결을 지우는 동그라미, 고래가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증거. 

지금도 카이코우라에서는 고래가 숨을 쉬러 한 시간에 한 번, 물 위로 올라오겠지.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삶은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말은 너무나 슬프지만, 저 멀리 뉴질랜드 카이코우라 바다에서, 몇 년이 흐르더라도 똑같은 호흡의 리듬으로, 푸른 바다 밑과 파란 하늘 밑을 들락거릴 향유고래를 떠올리면, 그렇게 슬프지만도 않다.

(20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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