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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랑 Oct 20. 2020

DNA

환갑맞이 가족여행

순식간에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눈 앞에 뵈는 게 없다.'는 말. 내가 딱 그랬다. 금방이라도 쌍욕을 퍼부으며 폭발할 마음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솟구쳤지만 동시에 '내가 여기서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하는 생각도 했다. 크게 한바탕 하려고 숨을 들이 마시는 순간,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참아."


아버지는 알았던 거다. 큰딸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났고, 그럴 때 어떤 모습일지를. 왜냐하면, 나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닮지 않기를 바랐던 모습까지도 닮는게 자식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도장으로 찍어냈다, 거푸집이 따로 없다, 는 말을 들을 정도로 꼭 닮았다. 겉모습만 그런게 아니라 성질도 닮아서 화를 참지 못할 때가 잦았다. 어릴 때는 덜 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나이가 들수록 몇 년에 한번 크게 화를 낸다. 

아버지는 활화산같았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폭발하는 화산. 어렸을 때는 그런 아버지가 무척 두려웠다. 아버지가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언제 화를 낼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사소한 일에도 크게 화를 냈던 아버지.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그렇게 화를 내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성미를 꼭 닮은 나에게 '네가 그럴 때마다 너무 속이 상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화가 나는 순간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순식간에 화를 내고 만다. 


8월 1일. 인터라켄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하는 날.

숙소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인터라켄 서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안 온다. 알고보니 국경일이라 버스가 쉰다. 급하게 택시를 불러서 서역으로 가서 도모도쏠라까지 가는 기차를 40분 남짓 탔다. 도모도쏠라에서 베네치아까지 가는 기차를 갈아 탔는데 우리 자리에 누가 앉았다. 기차 창문에 버젓이 우리 가족 이름이 다 끼워져 있는데 앉아 있길래, 여기 우리 자리라고 일어나 달라고 했다. 딱 다섯 사람, 프랑스 가족이었다. 짧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그 집 딸내미가 뭐라고 했냐면, '지금 이 기차 안에 자기 자리에 앉은 사람이 없다. 우리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도 다 일어나야 하니 너희가 빈 자리에 알아서 앉아라. 설마 그런 불편을 끼치진 않겠지?' 였다.

순식간에 눈에서 불꽃이 튀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아버지가 어깨를 잡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분명 인종차별적인 행동이었다. 기차 창문 위에 붙은 이름은 네 사람 모두 'LEE'니까 딱 봐도 동양인이고, 마침 다섯자리가 비었으니 거기 앉아서 버티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승무원을 찾아 다른 칸으로 가는데 마침 이탈리아 경찰이 여권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하자, 내 어깨를 거칠게 밀며, 얼른 네 자리에 앉으란다. 기가 막혔다. 씩씩 거리며 다른 칸으로 가서 승무원을 찾았다. 스위스 쪽 승무원으로 곧 역에서 이탈리아 승무원이랑 교대를 한다고, 말해두겠다고 했다. 일단 가족들은 빈 자리에 앉히고 이탈리아 승무원을 기다렸다. 거진 40분이 흘러갈 때쯤 승무원을 만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씩, 웃으며 "너는 어디까지 가니?" 묻는다. 소름이 확 끼쳤다. "우리는 밀라노 까지만 가면 되거든. 거기까지만 앉아서 가면 안될까? 우리가 내린 다음에 자리에 앉으면 되잖아." 어이없는 말이라 들은 척도 안했다. "오, 너 지금 나랑 말하기 싫다는 거니?" 이런 미친 X이! 참았다. 승무원이 몇 번이나 공손하게 일어나달라고 하자 나를 째려보며 일어난다. 아니, 내 돈 주고 예약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건 너네거든?! 그렇게 우리 자리에 앉아서 베네치아로 갔다.


베네치아는 산타루치아 역을 나서자마자 운하가 보인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베네치아만의 풍경. 이번 숙소도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운하를 가로지르는 수 많은 다리를 짐을 들고 걸을 수 없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일단 낮잠을 잤다. 아침에 벌였던 소동과 진득하게 달라붙는 베네치아의 더위와 습기에 지쳤던 모양이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세 시간 남짓 잤다. 느긋하게 일어나 저녁으로 카레를 해 먹고, 바포레토 24시간권을 사서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습해서 손풍기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운하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조금은 시원해졌다. 


어둑어둑, 어스름해지는 베네치아를 아버지가 웃으며 바라본다. 일렁일렁, 물 위에 비친 건물의 불빛들. 반 고흐의 그림 같다. 막내는 새로운 탈 것에 신이 났다. 베네치아 본섬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다녔는데 좁은 골목에 넘치는 관광객으로 본섬은 자동차를 타지 않고 배를 탄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불렀다는 산 마르코 광장. 7년 전, 혼자 둘러보았던 산 마르코 광장에 우리 가족이 왔다. 아무래도 7년 전 여행을 자꾸만 불러낸다. 혼자 왔던 곳에 가족이 함께 하는 행복.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와 광장을 가득 채우고, 노란 불빛이 흘러 넘치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고 갔다. 어두운 곳에서 찍으려고 부러 챙겨간 f1.4렌즈로 갈아 끼우고 가족 사진을 찍었다. 더위에도 지지 않고, 사진에는 행복이 묻어난다. 좀 더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정말 너무 더워서 얼른 바포레토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여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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